[역경의 열매] 주선애 (29) ‘한집 한 통장 갖기’로 쪽방촌에 새 소망 피어나

이 전도사 ‘내 집 갖기 운동’ 제안… 통장 보며 활짝, 동네에 희망 움터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오른쪽 네 번째)가 1976년 이상양 전도사(왼쪽 세 번째), 망원동 빈민선교를 돕던 영락교회 백합회 회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상양 전도사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질수록 뚝방촌 사람들의 상담 요청이 많아지고 도움 청원도 늘어났다. 이 전도사는 봉사하는 동안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는 어느 날 저녁 공터에 불을 밝혀 놓고 동장과 동네 어른, 이종성 장로회신학대(장신대) 학장님을 불러 모임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는 무허가 집에 사는 이들이 집이 언제 뜯길지 모르는 불안감으로 살아가는 걸 멈추게 하고 싶다며 ‘내 집 갖기 운동’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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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도사는 그들에게 새 소망을 주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 첫 단추는 ‘한 집 한 통장 갖기’였다. 이 전도사가 저축통장을 책임지고 맡기로 하고 주민들이 하루 벌이를 하면 생활비를 떼고 저축을 독려키로 했다. 그는 땅을 매입해 연립주택을 지을 계획도 갖고 있었다. 판잣집을 헐면 정부에서 보상금을 지급하는데 거기다 집을 지을 수 있다고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했다. 주민들에게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며 27㎡(약 9평)짜리 집을 지어 우리 손으로 단장하고 행복하게 살자고 격려했다.

그는 통장을 1000개나 만들었다. 그리고 ‘한 집 한 통장 갖기’를 시작했다. 나는 금융 사고가 많을 때에 가능할까 싶은 의심도 있었지만, 이 일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길 기도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귀가했다. 그러곤 이 모든 과정을 미국에 있는 마애린(Eileen Moffett) 선교사에게 알리며 도움을 요청했다. 집은 어떻게 짓는다 해도 대지가 없으니 미국에서 대지 구입비를 도와줄 곳이 없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하고 기도하기로 했다. 얼마 지나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2700㎡(약 900평)를 살 수 있는 땅값이 마련된 것이다.

빈 병과 엿을 바꿔 파는 사람, 고무풍선을 자전거에 싣고 파는 사람, 생선을 이고 다니며 파는 아주머니 등이 모두 통장을 갖고 저녁이면 이상양 전도사를 찾아왔다. 저금통장을 보며 활짝 웃는 표정이 아름다웠다. 점차 술 먹는 사람들이 줄었고 싸움도 사라졌다. 동네에 희망이 움트기 시작했다.

드디어 공사가 시작됐고 흙벽돌 집이 길게 들어섰다. 때마침 나라에서 새마을운동의 모범이 된다며 마을 동장에게 포상금도 지급했다. 그 후로도 숨은 기도자들의 헌신으로 모금이 이뤄졌다. 영락교회 어머니 성경반이 중심이 된 ‘백합회’도 그중 하나였다. 크리스마스엔 조그마한 선물 꾸러미를 만들어 가가호호 방문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도 그들에겐 큰 기쁨이 된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전도사의 병세가 깊어지더니 검사 결과 폐를 제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 때문에 망원동에 처음 갔고 거기서 숱한 고생을 하다 그렇게 된 것 같아 죄책감에 휩싸였다. 수술하고 누워있던 병실에 찾아갔더니 이 전도사는 숨이 차 헐떡이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선생님. 너무너무 행복했습니다. 선생님이 이곳에 보내주셔서 제 생애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인생을 달관한 신앙 간증이었다. 3월 개학을 앞두고 시간을 내 이 전도사를 찾아갔다. 그는 아주 쇠약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삶을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이번에 하나님이 저를 부르시면 제 집사람과 아들을 부탁합니다” 하며 유언처럼 자기 심중을 들려줬다. 얼마 후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1977년 3월 25일. 장신대 학도 호국단 주최로 장례를 치렀다. 그 후 장신대 학생들은 매년 3월 말 이 전도사 추모예배를 드리곤 한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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