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사태 원인을 近因에서 찾고 있는 반면 우리는 역사적 遠因까지 보고 있어
맞불로 대응할 게 아니라 한·일 협정문에 따라 풀겠다는
의사 전하고 테이블에 마주 앉아 가슴을 열고 대화해야


일본과의 사이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청와대가 나섰다. 주무장관들이 핫바지 방귀 새는 소리만 하고 있는 사이, 재기발랄한 정책실장은 ‘롱리스트’ 전략도를 펼쳐 보이고 날렵한 안보차장은 미국까지 날아가서 ‘세게’(공감) 원군을 데려왔다. 대통령이 병참을 점검하고 드디어 ‘배 12척’으로 배수의 진을 치자, 오지랖만 넓은 민정수석은 기억의 창고에서 죽창을 찾아내 단숨에 달려왔다. 여당이 의병을 부른 지 한참 지난 다음에서다.

임전태세를 확인한 장수는 한층 더 큰 목소리로 ‘왜구의 만행’을 질타하고 경고한다. ‘토착왜구’에 눈을 부라리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서슬에 질린 탓인지 ‘토착왜구’는 자취를 감추고, 방방곡곡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불매’운동에 돌입하고 있다. 그래도 왜구의 만행은 그치지 않고 더욱 교묘해지면서 조정의 안위까지 위협한다는 첩보가 들어온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장수는 독전(督戰)의 북채를 단단히 잡고 힘차게 내려친다. 그런데 북소리가 이상하다. ‘뒷북’이다.

현재 전개되고 있는 일본과의 갈등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을 이렇게 묘사하는 필자의 마음은 결코 편치 않다. 위로부터의 반일감정이 고취되고 있는 이 시기에 닥치고 반일대열에 서지 않으면 친일파, 그것도 ‘토착왜구’로 몰리기 십상인 척박한 풍토를 의식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일제 식민지지배의 원통한 역사에서 비롯된 우리의 뿌리 깊은 반일감정이 모든 경우에 자신을 정당화할 수는 없고 자칫 잘못하면 현 사태에 대한 냉철한 대응을 저해할 수 있다는 다소 불편한 얘기를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현 사태의 원인을 근인(近因)에서 찾고 있는 반면 우리는 보다 근본적으로 역사적 원인(遠因)까지 포함해서 보고 있다. 한·일협정 체결로 과거청산이 완결되었다는 일본 주장에 대해 우리는 불충분하다는 생각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시간이 지나서도 위안부 문제를 제기해 전 정부에서 별도의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지만 현 정부는 전 정부 합의가 잘못되었다며 사실상 파기해버렸다. 일본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신뢰 위배’라고 항변하고 있던 차에 우리 대법원의 징용배상 판결에 따라 당해 국내 일본기업에 대한 압류조치가 행해지자 ‘경제보복’ 카드를 빼내든 것이다.

치밀하게 준비된 일본의 경제보복은 우리 경제의 급소를 겨냥하고 있다. 예고된 조치가 더 이어진다면 치명상을 입을 것이 뻔하다. 그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따라잡기’에 성공하고 이제 한 단계 더 발돋움하려는 국면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인지 일각에서는 우리 경제를 고꾸라뜨리려는 ‘나쁜 일본’의 음모로 해석하기도 한다. ‘맞불’로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일본제품 불매 ‘의병운동’으로 이어지고 심지어 국내에서 활동 중인 일본인 연예인의 추방까지 거론되기도 한다. 게다가 우리가 수입한 전략물자가 북한으로 유출되었다는 일본 당국자의 언급은 청와대를 분기탱천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준비에 대한 ‘김 빼기’로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라고 보고 대통령이 나서 경고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맞불은 답이 아니다. 맞불의 화력이 약해서만은 아니다. 우리의 의병이 예전 같지 못해서도 아니다. 현재 풍향은 우리에게 유리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놓은 맞불이 바람에 실려 우리를 덮칠 수도 있음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제보복이라는 수단에는 속이 터지지만 ‘신뢰 위배’는 우리에게 아픈 지적이다. 근대국가 대한민국이 서명한 합의문이 분명히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일협정 합의문은 ‘독재자’가 서명했고 위안부 합의문은 ‘독재자의 딸’이 서명했기 때문에 무시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은 폭군만이 할 수 있는 전근대적 사고다.

모두가 알고 있는 답은 외교적 해결이다. 해석을 달리해서 야기된 문제를 한·일협정문의 규정에 따라 풀어나가겠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전달하고, 모든 대화의 문을 열어라. 중재위원회를 통해 문제를 풀고 안 되면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가는 절차를 준수하자. 이를 통해 국내의 정치적 걸림돌도 치우자. 전략물자관리 문제와 관련해서는 제3국의 검증을 받자는 정부의 제안에 구애되지 말고 그동안 불참했던 전략물자관리위원회 개최도 수용하자. 당당하면 못할 바가 없다.

마침 오늘 대통령과 5당 대표의 회동이 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무엇보다도 일본과의 외교적 돌파구가 마련되길 바란다. 정당 대표들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통해 특사를 파견한다면 대통령의 체면손상 없이 아베 신조 총리의 입지를 존중하는 모양새가 될 것이다. 양국은 추가적인 행동을 우선 멈추고 대화 테이블에서 만나 가슴을 열고 머리를 맞대자. 도쿄올림픽이 열리는 내년은 한·일 국교정상화 55주년이 되는 해이다. 아베 총리와 문재인 대통령이 나란히 앉아 환하게 웃는 모습을 그려본다.

김대환 (인하대 명예교수·전 노동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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