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각수 전 일본 대사는 “일본의 경제보복 시나리오 중 최악은 금융 조치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이 만지작거리는 한국에 대한 여러 보복 카드 중 짧은 시간에 가장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조치라는 것이다. 금융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지난 5월 말 기준 국내 진출 일본 은행 지점의 여신 규모는 24조6877억원으로 전체 외국계 은행 여신의 25.2%에 달한다. 이는 중국(33.6%·32조9000억원)에 이어 국가별로 두 번째로 큰 규모다.

금융당국은 “원론적으로 금융 보복을 우려할 수 있지만, 일본이 현실적으론 실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금융권 전체 여신 중 일본 자금의 비중이 크지 않고, 빠져나가도 다른 데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종구 금융위원장도 지난 5일 “일본이 돈을 안 빌려줘도 얼마든지 다른 데서 빌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한국 경제가 휘청거릴 때를 되돌아보면 지나친 낙관이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엔 미국의 지시에 따라 일본 은행들이 단기대출 만기연장을 거부한 게 국가 부도 사태로 이어졌다. 일본의 수출 제한 조치가 전 분야로 확산하는 가운데 짧은 시간에 일본 자금이 빠져나가면 금융 시장의 변동성이 증폭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단기간에 한국 기업에 대한 여신 회수가 몰리면 기업 신용도도 추락할 것이다. 국제결제은행(BIS) 집계에 따른 한국에 대한 일본 은행의 총여신도 눈여겨봐야 한다. 정확한 규모는 공개되지 않고 있지만 2018년 말 기준 562억7000만 달러(약 66조4000억원)다. 일본 은행의 국내 여신이 25조원 정도인 점을 고려하면 해외에서 국내 기업이나 금융회사가 일본계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이 40조원이 넘는다는 얘기다. 해외에서 빌린 이 자금이 뇌관이 될 수 있다. 명심해야 할 점은 은행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이 강한 것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일본계 은행이 정부의 암묵적 지시에 따라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에 대한 여신을 한꺼번에 회수하거나 한국 금융시장에서 투자금을 일시에 빼낼 수 있다. 그것은 ‘블랙스완(불가능하다고 생각되지만 일단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을 주는 사건)’이 아니라 충분히 가능한 경우의 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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