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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배병우] 對日 강경책만으론 안 된다


징용 보상에 대한 진전된 案이 한·일 교섭의 최소한 조건, 이것은 한국이 충족시켜줘야
화이트 리스트서 배제 현실화하면 한국경제 못 버텨

편협한 민족주의는 역효과만 냉정하고 전략적 대응해야


일본이 불화수소 등 3개 물질의 수출 규제를 선언, 한국에 대한 경제 보복의 포성을 울린 지 3주가 돼간다. 18일까지는 양국이 최소한 타협의 실마리는 잡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도리어 악화일로다. 일본은 강제 징용 배상 판결과 관련, 한일 청구권협정에 근거한 중재위원회 구성에 18일까지 응할 것을 요구해 왔다.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은 분쟁 해결 절차로 외교 경로를 통한 협의, 양국 직접 지명 위원 중심의 중재위 구성, 제3국을 앞세운 중재위 구성 등 3단계 절차를 두고 있다. 청와대는 일본이 제시했던 마지막 단계 중재위 구성 제안을 결국 수용하지 않기로 했다.

징용 피해자 배상과 관련해 기존 정부안보다 진전된 안으로 관심을 끈 ‘1+1+α’도 파탄 났다. 이 방안은 현재까지 대법원에서 승소한 피해자에 대해선 한·일 기업(1+1)이 책임을 지되 향후 판결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α)가 책임지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15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우리가 제시한 방안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한 바 없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1+1+α’안 수용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 측에서 이 안을 제안한 적 없다고 확인했고, 청와대도 공식 부인했다. 정부는 국제사법재판소(ICJ) 회부에도 반대한다는 걸 명확히 했다. 이에 따라 지난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직전에 허겁지겁 내놓았지만 일본이 즉각 거부한 ‘1+1’안 외에는 정부의 제안이 없는 셈이다. 강제 징용 배상 안의 뿌리인 한일 청구권협정에 대해 정부가 분명한 입장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아직도 ‘강제 징용 판결은 사법부 결정이며, 행정부가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곤란하다. 한국 정부와는 대화가 안 된다는 일본의 주장이 국제사회에서 먹혀들 수밖에 없다.

일본 총리실이 중심이 돼 밀어붙인 대한(對韓) 수출 규제 조치는 한·일 관계의 기틀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외교로 풀어야 할 과거사 문제를 무역·통상 문제로 만들었다. 이 부분을 강력히 문제 제기해야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등 실효성은 떨어질지라도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등을 통해 국제 여론전을 펼치는 게 옳다. 외교 문제를 경제 문제로 푸는 부당함에 대해 선례를 남겨야 한다. 전략물자의 북한 유입설까지 흘려 한국을 ‘믿을 수 없는 국가’로 매도하는 것에도 마찬가지다. 모든 물증을 갖다 대 다시는 허위 주장을 못 하게 해야 한다. G20 정상회의에서 자유무역을 주창한 지 며칠 만에 도널드 트럼프식 보호무역주의 흉내를 낸 것은 아베 신조 총리의 아픈 곳이다. 아베가 외무성을 배제한 채 보복 조치를 비밀리에 진행한 것에 대해 일본 내 거부감도 있다. 이러한 지점을 파고들어야 한다. 일본의 강공에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 표명도 협상 과정에서 필요하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경고와 강경책만으로 이번 사태를 풀 순 없다. 무엇보다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 진전된 안을 내놓지 않으면 국제 여론은 물론 일본의 혐한 기류를 누그러뜨릴 수 없다. 게다가 한국 정부에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대법원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옳고 그름은 차치하더라도 정부가 지난해 10월 판결 이후 한일 청구권협정에 규정된 분쟁 절차에 일절 응하지 않은 것이다. 국제법과 국제규범을 깡그리 무시한다는 일본의 주장이 먹혀들 빌미를 줬다. 미국이 ‘한국 손’을 들어주지 않는 데는 한국 정부가 국가 간의 합의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보다 온건한 방식으로 한·일 간 갈등이 해결되기를 원하는 일본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국제 여론을 등에 업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가 징용 판결에 대한 정부의 유연한 자세다. 특히 시급한 것이 일본 전범 기업의 한국 내 자산 현금화 조치를 유예하는 것이다. 다른 조정안이 모두 막힌 지금 현금화 조치 유예라는 신호를 보내 협상 시간을 벌어야 한다. 징용 피해자, 한국과 일본 정부 모두를 만족시키는 묘약은 없다. 문 대통령이 결단해야 한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건 이른바 ‘화이트리스트’에 대한 청와대의 인식이다. 일본이 안보상 우호국 성격인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빼도 ‘별 문제 없다,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정말 큰일이다. 올해 국내총생산(GDP)이 어느 정도 줄어드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50년간 유지돼 온 한국 경제의 성장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다. 일본을 적으로 돌리고 중국의 무서운 추격에 노출된 상태에서 한국 경제가 성장 동력을 유지할지 심히 의문이다. 지는 싸움이며, 미래가 없다. 지는 싸움은 하지 않는 게 병법의 기본 중 기본이다.

청와대 참모들이 인터넷에 올리는 죽창가와 동학운동 운운 등 편협한 민족주의 레토릭은 역효과를 낼 뿐이다. 일본 우익들이 단합할 빌미를 주고, 반한 정서를 격화시킬 뿐이다. 아베는 치밀하고 용의주도하게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의 대응은 냉정하고 전략적이어야 한다.

논설위원 bwb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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