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선애 (31) 감격스런 평양 기도회, 부흥회처럼 열기로 넘쳐

긴박한 분위기 속 목회자 50여명 모여 북한을 위한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돼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오른쪽)가 2002년 평양 방문 당시 옥류관에서 이만열 교수(가운데)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 목사님의 외침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좋습니다”라고 동의를 표했다. “아래층에는 보위부 안전원들이 가득 있습니다. 한꺼번에 자리를 뜨지는 말고 방에 올라가서 성경책을 갖고 옷을 갈아입고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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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 최홍준 목사님의 지령 같은 한마디에 현장엔 긴장감이 돌았다. 어떤 목사님은 주변 참석자에게 “우리 집 연락처를 드릴 테니 후에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분위기는 점점 긴박해졌다. 목회자 50여명이 함께 모여 순서를 짜고 행동할 준비를 했다.

이윽고 예배가 시작됐다.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찬송이 그토록 절절한 호소이자 간구로 마음에 와닿았던 적이 있던가. 찬송 소리는 점점 커졌다. 부를수록 힘이 생겨 테이블을 치다가 발로 박자를 맞추면서 찬송했다. 통성기도를 할 때는 더 뜨거워졌다.

기도회는 부흥회가 됐다. 다들 오직 북한을 위해 뜨겁게 기도했다. 북한 사람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든 걱정이 되지 않았다. 나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회개 기도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사람들이 하루하루 지옥처럼 살아가는데 나는 배부르게 잘 먹고 잘살면서 감사함을 잊어버린 죄를 고백했다.

‘내가 이곳에 그냥 살았더라면 고생하다가 벌써 죽었을 터인데 이렇게 복 받은 몸으로 살아오다니. 순교한 사람도 그렇게 많은데 나는 순교를 피해 남한으로 와서 즐기면서 살아온 것 아닌가.’

주님을 위해 죽다 살아남은 사람답게 열심히, 더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살지 못한 죄인임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렸다. 최 목사님이 “이제 이만열 교수님과 주선애 교수님께서 나오셔서 각각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안내하는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사님들이 많은 자리에서 말을 아껴왔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말씀을 선포하고 싶은 마음을 성령님께서 주고 계시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교수님은 평양에서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신앙 선배들의 고귀한 헌신을 소개해주셨다. 이 교수님에 이어 앞에 나섰다. 그리고 담대하게 이야길 전했다.

“저는 이곳 평양에서 나서 여기서 자랐는데 1948년 이곳에 핍박의 기운이 감돌 때 순교할 자신이 없어 남한으로 도망갔었습니다. 50여년 만에 고향에 왔는데 마음이 착잡합니다. 곳곳마다 집채만 한 크기로 걸려 있는 현수막엔 ‘수령님은 살아 계신다’가 쓰여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우리가 우렁차게 찬양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눈물이 납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 예배가 없었다면 그저 봉수교회에 가서 예배 한 번 드리고 왔다고 보고하게 될 뿐이었을 텐데 하나님께서 북한에 대해 무관심한 채 풍요만을 추구하던 남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전 7시에 시작한 예배는 오후 2시까지 금식하면서 진행됐다. 2시가 넘어서자 보위부원들은 말을 바꿔서 이제 그만하고 봉수교회에 가라고 했다. 그제야 우리 일행은 늦은 점심을 먹고 봉수교회로 갔다. 교회는 텅 비어 있었다. 우리를 맞은 교회 목사라는 사람은 정치 선전 같은 말만 쏟아 냈다. 연이어 칠골교회를 방문했다. 거기에서도 목사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하나도 없고 예배당은 텅 비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멀찍이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접촉할 수 없게 한 모양이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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