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오래된 2층짜리 건물 끄트머리에 작은 목공소가 하나 있다. 몇 해 전만 해도 돋보기를 쓴 백발의 주인이 작업대 앞을 지키고 있었다. 피아노학원에 다니던 둘째 아이는 가게 유리창 너머로 ‘그 할아버지’가 보이면 낡은 미닫이문을 열고 불쑥 들어갔다. 오가며 나눈 눈인사 몇 번에 친해져 말동무가 된 듯했다.

어느 날인가 혼자 그 앞을 지나치다 바람을 쐬고 있던 ‘그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눈인사만 하기에는 머쓱해 몇 마디를 붙였다. 목수 일을 60년 넘게 했다며, 이제는 딱히 찾는 손님이 없지만 소일거리 삼아 나온다고 했다. ‘보기보다 연세가 많으시다’ ‘긴 세월 갈고닦은 솜씨가 아까우시겠다’ 같은 말을 건넸다. 그랬더니 목수 일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없다고 한탄 같은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꽤 시간이 흐르고 그 가게 앞을 지나치게 됐다. 미닫이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그래도 가게가 없어지지 않은 걸 보면 가끔이라도 나오시는구나 싶었다. 목공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라, 진즉에 ‘그 할아버지’에게 간단한 기초기술이라도 배워볼 걸, 반세기 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엿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생겼다. 유명인사가 아니라도 개개인이 땀 흘리며 살아온 세월, 땀으로 얼룩진 경험은 귀하다. 그 ‘축적의 시간’을 공유하고 맛볼 수 있다면 꽤 근사한 일이다.

서울지하철 4호선 노원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거나, 770m가량을 걸으면 노원구에서 세운 노원정보도서관이 나온다. 이곳에는 전국에서 유일한 상설 ‘사람 도서관’이 있다. 자신의 경험, 지식, 지혜를 나누려고 등록한 ‘사람 책(Human Book)’을 열람할 수 있는 곳이 사람 도서관, 휴먼 라이브러리(Human Library)다. 홈페이지에서 주제별로 나뉜 사람 책을 고르고 열람을 신청하면, 사람 책과 신청자가 만나는 일정이 정해진다. 사람 책이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신청자 질문에 답을 한다. ‘인생은 아름다워’ ‘우주과학 이야기’ ‘행복한 노후생활의 길잡이’ ‘어려운 법률, 쉬운 변호사’ ‘꿈 너머 꿈을 꾸라(왜 도시농부가 되었는가)’ 같은 사람 책을 열람 신청할 수 있다.

휴먼 라이브러리는 덴마크의 사회운동가 로니 에버겔이 2000년 기획한 한 뮤직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실험이었다. 이후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여러 나라로 번지고 있다. 휴먼 라이브러리의 뼈대는 소통과 공유다. 은행에 돈을 맡기고 찾는 일도, 음식을 주문해 배달시키는 일도, 예쁜 구두 하나 사는 일도 모두 사람과 얼굴을 맞대지 않고 하는 ‘비대면의 시대’에 ‘대면의 가치’를 수확하는 셈이다. 사람 책으로 가장 주목받을 이들은 노인이다. 텃밭에 마늘, 파, 상추 키우는 법부터 자동차 정비, 목수 일, 도배하는 법, 인생을 후회 없이 살 수 있는 길 등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하다.

한 달 전쯤 식사를 함께한 시중은행장은 불쑥 ‘노인의 시간’ 얘기를 꺼냈다. “지금 내 시간을 은행에서 몇 십만원을 주고 사지만, 은퇴하고 나면 누구도 내 시간을 사주지 않을 것이다. 비영리단체에서 노인의 시간을 사주는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 노인의 시간, 경험, 지혜를 사들여서 세상과 나누자는 제안이다. 한국은 노인빈곤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정년퇴직과 국민연금 수령 나이 사이에 ‘소득 보릿고개’도 놓여 있다. 길게 일해야만 하다 보니 일자리를 두고 청년과 장년층 또는 노인 간에 갈등도 빚어진다. 대중교통에 노약자석을 만들고 경로우대를 외치지만 어느 때보다 노인을 무시한다. 밀려난 노인들도 세상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대면의 가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곳에서 빛난다. 갈등과 단절이 자리 잡은 공간에 신뢰와 연대를 심을 수 있다. 월 65만원을 주고 지역아동센터나 장애인시설에서 식사보조를 하는 단기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노인 일자리 사업보다 ‘노인 사람 책’ ‘노인 도서관’ 사업이 더 값지지 않을까.

김찬희 경제부장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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