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감정은 국민에게 맡기고 국가는 이성적으로 전략 짜야
反日만으로는 사태 해결 못해
수입 다변화·기술경쟁력 강화 통해 국력 키우고
국익의 관점에서 외교 정책 재점검 해야


“이성이 잠들면 악마가 나타난다.” 한국의 핵심 산업을 겨냥한 일본의 경제보복 조처로 야기된 어지러운 현재 상황을 보면서 에스파냐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에칭 작품이 생각난다. 이념과 이상의 광적 집착이 오히려 폭력을 생산한 프랑스대혁명의 정치적 현실을 통렬히 고발한 고야는 이렇게 묻는다. 무엇이 이성을 잠들게 만드는가?

일본의 대한국 수출규제 조치로 촉발된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냉철하고 예리한 이성을 요구하지만 이성을 흐리게 만드는 요소가 너무 많은 것처럼 보인다. 일본의 경제보복은 두말할 나위 없이 부당하고 졸렬하다. 광복 이후 70여년 동안 경제적 협력을 통해 역사와 정치를 분리, 과거사 문제를 어느 정도 관리해 왔던 전후의 양국 관계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키는 어처구니없는 처사이다. 일제 침략의 기억이 생생한 우리 민족에게 이번의 경제보복이 ‘경제침략’으로 느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과거 제국 침략을 연상시키는 일본의 경제보복 발표는 ‘민족감정’의 뇌관을 건드린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참여하고, 일본 여행을 취소하고, 아베를 규탄하는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민족이 민족으로서 공격을 당할 때 대응하지 않는다면 민족의 정체성과 연대감은 유지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감정적 반일 물결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성을 잠들게 하는 것은 항상 ‘과도한 감정’이었다. 민족이 감정적이어도 국가는 이성적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여기서 우리의 걱정은 커지고 마음은 심란해진다. 이성적으로 대응해야 할 국가가 오히려 민족감정을 부추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12척의 배로 나라를 지킨 이순신 장군의 결의를 호소하고, 민정수석은 반외세를 주장했던 동학농민운동의 죽창가를 외친다. 의병을 일으키고 국채보상운동을 한 것처럼 대대적 저항운동을 해야 한다고 한다. 국민 모두가 일심 단결해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응하자는 게 진심이겠지만, 시대착오적인 비유는 자극적이고 위험하다.

민족감정을 부추기는 이 정권의 자극적인 언어와 수사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이성은 차이를 존중하지만, 감정은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전쟁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좌냐 우냐가 아니라 ‘애국이냐 이적이냐’이다”라고 말하면서 이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라고 규정한다. 숭고한 민족감정을 정치적으로 오용하는 현 정권의 관제 민족주의는 급기야 문재인정부의 대일정책과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친일파로 몰아 입에 재갈을 물리려 한다. 반일감정 자극하지 말고 합리적 해법을 찾자고 하면 ‘넌 친일파고 매국노다’라는 프레임이 씌어진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권이 대화와 타협, 이견과 이성을 배제하는 비민주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다.

국가가 감정적이면 고통은 국민이 당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야 할 국가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공동체의 질서와 안전을 보장할 ‘국가이성’을 주장한다. 국가이성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능력이다. 일본에 대한 민족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전에 ‘왜 일본이 이 시점에서 경제전쟁을 일으켰는가’를 물어야 한다. 트럼프와 시진핑 같은 신권위주의적 스트롱맨의 등장으로 시작한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은 세계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한국의 현실을 냉철하게 재점검해야 할 때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냉전으로 ‘세계화의 시대’는 끝났다. 사회주의적 전체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가 번성할 수 있다는 전대미문의 현상을 보여준 중국의 부상은 하나의 현실이다. 중국의 부상은 세계의 곳곳에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설치한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아시아 최강국이었으며 반세기에 걸쳐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은 미국에 기대어 옛 영광과 영향력을 되찾으려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국력을 강화해야 하는가. 우리 현실의 복잡한 관계와 요소를 꿰뚫어 보고 국익을 강화할 수 있는 이성만이 답을 줄 수 있다. 민족감정에만 호소하는 이 정부의 태도가 우려되는 이유이다. 포스트 세계화 시대에 올바른 방향을 잡고 국력을 강화하는 것은 국가의 몫이다.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다고 말할 정도로 우리는 약하지도 않으며, 불매운동으로 수입 다변화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반일운동으로 기술경쟁력이 강화되는 것도 아니다.

민족감정은 국민에게 맡기고, 국가는 일본에 대응할 수 있는 국력을 키울 일이다. 국가가 감정적이 되면 자신이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지금이라도 경제와 외교의 실정을 민족감정으로 덮으려 하지 말고 모든 정책을 국익의 관점에서 재검토하는 국가이성을 되찾을 때이다. “이성이 잠들면 재앙이 닥쳐온다.”

이진우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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