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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민태원] 정체된 생명나눔, 돌파구 필요하다


얼마 전 한국장기조직기증원(KODA)에서 일하는 지인으로부터 안타까운 얘기를 들었다. 지난 2월 대구에 사는 50대 남성이 뇌출혈로 쓰러져 뇌사에 빠졌다. 남성은 오래 전 이혼하고 사실혼 관계인 배우자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현재로선 그녀가 유일한 보호자였다. 병원으로부터 뇌사 추정자로 통보받아 기관 소속 장기기증 코디네이터가 곧바로 출동해 기증 절차를 밟으려 했지만 곧 벽에 부닥쳤다. 남성은 평소 장기기증 뜻을 자주 내비쳤고 배우자도 그 뜻을 존중해 동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의 배우자가 법률상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기기증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현행 장기이식법은 선(先)순위 가족 1인의 동의가 있어야 장기기증이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본인이 사전에 장기기증 의사를 밝히고 기증 희망자로 등록했다 하더라도 뇌사가 됐을 때 가족이 반대하면 최종 기증할 수 없다. 코디네이터는 동사무소 협조로 발급받은 가족관계증명서를 통해 이혼한 전 배우자와 사이에 선순위 가족에 해당되는 딸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어렵사리 찾아낸 딸은 그러나 “20년간 연락을 끊고 살았고 그런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며 냉정하게 거부했다.

결국 남성의 숭고한 뜻은 현행 법규에 가로막혀 불발됐고 장기이식 기회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힘겹게 투병 중인 중증 질환자들이 새 생명을 얻을 기회도 더 미뤄졌다. 뇌사자 한 명의 장기기증으로 최대 8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 장기기증 업무 관계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최근 가족과 연을 끊고 사는 ‘분절된 가족(broken family)’이 늘고 있는 상황이나 사실혼, 싱글족 등 현대사회의 복잡한 가족 형태를 장기기증 법령이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KODA에 따르면 뇌사자의 장기기증 과정에서 가족 동의를 얻지 못해 최종 기증이 좌절되는 비율은 지난해 63.5%에 달했다.

또 하나, 기증 과정에서 선순위 동의권자의 결정이 존중돼야 하는데 실제론 그렇지 못하다는 것도 문제다. 가족 중 누구라도 반대해 의견이 일치되지 않으면 사실상 기증이 어렵다는 것이다. 선순위 가족이 기증에 찬성했는데도 가족 모임에서 다른 가족의 반대로 기증 의사가 번복되는 경우가 최근 5년간 평균 10%나 된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 동의한다면 기증 절차가 진행될 수 있도록 법·제도의 개선이 있어야 한다. 종국엔 ‘본인 기증 의사 존중법’이 마련됐으면 한다. 기증에 대한 뇌사자의 평소 뜻이 명확히 밝혀진 경우 가족 동의와 상관없이 기증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미국 등지에선 이런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앞서 얘기한 장기기증의 가족 동의율 감소와 뇌사를 유발하는 교통사고·뇌혈관질환의 감소, 장기기증에 대한 미디어의 부정적 묘사 등 여러 요인이 복합 작용해 뇌사자 장기기증은 해가 갈수록 줄고 있다. 뇌사 장기기증자는 2016년 573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17년 515명으로 떨어졌고 지난해(449명) 500명 선이 무너졌다. 벌써 중반을 넘긴 올해도 지난해와 비슷하거나 더 떨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사그라드는 생명 나눔의 불씨를 되살릴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해 보인다. 최근 의료계와 정부, 국회가 이를 위해 논의의 장을 적극 마련하고 있는 점은 긍정적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뇌사자 가족의 기증 동의율을 높이기 위한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다. 변화된 가족 개념에 맞게 장기이식 법령의 정비가 이뤄져야 한다. 아울러 기증 활성화의 새 통로로 모색되고 있는 ‘심정지 환자의 장기기증(DCD)’에 대한 국민 공감대 형성도 필요하다. 장기기증은 말 그대로 ‘생명 나눔’이자 ‘생명 잇기’다. 한 명의 고귀한 희생과 결단으로 여러 생명을 살릴 수 있다. 24일 현재 질병관리본부 장기이식관리센터(KONOS)에 등록된 장기이식 대기자는 3만7996명이다. 이들은 장기이식만을 간절히 기다리다 하루 5명꼴로 숨져간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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