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 미국은 사담 후세인 정권 축출을 위해 이라크를 침공했다. 미군은 대통령궁, 관공서, 군사 기지 등이 밀집한 티그리스강 서쪽 강변의 바그다드 중심부를 ‘국제구역’으로 지정해 관리했다. 테러 공격에 대비해 몇 겹의 바리케이드와 방호벽 등으로 차단된 이곳은 ‘그린존(green zone)’으로 불렸다. 미군이 특별관리하는 안전구역이라는 뜻이다. 미군은 위험한 구역이라는 뜻의 ‘레드존’에 대응해 이렇게 명명했다.

외신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이 용어가 국내 경제기사에도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의 경제 보복이 장기화할 조짐이 짙어지면서다.

일본의 소재 압박에 위기를 느낀 삼성전자 등 한국 반도체 업체가 일본의 횡포를 차단할 수 있는 그린존(안전지대)으로 미국을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모든 D램을 한국에서 만든다. SK하이닉스는 D램 생산량 60%를 한국에서, 나머지 40%는 중국에서 제조한다. 일본은 한국 반도체 업체의 중국 공장에도 불화수소 등 핵심 소재의 공급을 규제하고 있다. 결국 아베 신조 총리의 독기가 미칠 수 없는 안전지대는 사실상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버티고 있는 미국 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의 ‘유혹’도 무시할 수 없다. 트럼프는 지난 6월 30일 방한 중 가진 기업인 간담회에서 “지금보다 투자를 확대하기에 적절한 기회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한국 대기업들의 미국 투자를 당부했다. 백악관에 따로 초청했던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가리키며 “미국에 3조6000억원 투자를 약속했다”며 다시 추켜세웠다. 하지만 반도체 제조 공장의 미국행에 경제성이 있는지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반도체는 수요처인 전자제품 조립업체와 부품공급 인프라가 모두 아시아에 있다. 생산설비의 미국 이전 시 상당한 비용 상승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는 얘기다.

삼성전자가 미국을 그린존으로 검토하는 것은 트럼프 시대 국제경제 질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상징이다. 외교 역량이 부족하면 자국 핵심 기업마저 국내에 보전하지 못할 수 있다. 고용과 성장에 도움이 되는 기업 유치에는 우방 사이에도 한치의 양보가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우방과 적국의 구분도 모호해진 약육강식의 시대다.

배병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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