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유대열 (2) 성분 좋은 가정서 태어나… ‘무조건 충성’ 가정교육

새벽에 깨끗한 수건 들고 김일성 동상에 절한 후 주변 쓸고 닦아… ‘김일성 소년 영예상’ 금훈장 받기도

유대열 본향교회 목사가 1998년 11월 28일 송파제일교회 박병식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있다. 유 목사는 94년 탈북해 97년 한국에 들어왔다. 본향교회 제공

나는 북한 사람들이 말하는 이른바 ‘성분이 좋은 가정’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군 장교로 근무하셨는데 내 기억 속 아버지의 첫 계급은 상좌(중령과 대령 사이 계급)였다. 우리 가족은 북한 인민무력부 군관들이 사는 전용 아파트에서 살았다. 내 친구들의 아버지들보다 우리 아버지는 이미 몇 계급이나 더 높았다. 그만큼 능력을 인정받으셨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버지는 인민군 특수 8군(현 폭풍군단) 참모장(한국의 준장급)을 마지막으로 예편하셨다. 아버지는 1970년 김일성군사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셨다. 당시 출셋길이 열렸다고 평가받는 김일성 호위사령부 작전국에도 배치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이력이 발목을 잡았다.

어머니의 오빠, 즉 나의 큰 외삼촌이 만주에 살다 도쿄로 고학을 떠나시면서 소식이 끊긴 것이다. 북한에서 이런 경우는 행방불명으로 처리하고 아주 좋지 않은 부류로 본다. 이 일이 아버지의 진급을 가로막은 것이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너희 아버지의 발전을 막을 수 없다. 이혼해야 한다”시며 우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는 결국 인민무력부 작전국에 배치되셨다. 당시로써는 이것도 매우 출세한 것이었다.

나에게는 집안에서 셋째이신 작은 할아버지도 계셨다. 작은할아버지도 출세 가도를 달리셨다. 해방 후 그는 김일성의 눈에 띄어 소련 모스크바 법학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됐고 노동당 정치국 위원이자, 대남담당 비서까지 오르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아버지나 작은할아버지는 참 고지식하신 분들이셨다. 그들은 공산주의라는 이념에 충실했고 김일성에게 충성만 했던 사람들이었다. 한번은 내 큰 형님이 아주 좋은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됐다. 그러자 어머니가 작은할아버지를 찾아가 김일성대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전화 한통만 넣어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하지만 작은할아버지는 그 부탁을 단칼에 자르셨다. 사람들은 큰 형님이 진짜 실력이 아닌 작은 할아버지가 힘을 써서 들어갔다고 생각할 것이란 게 이유였다. 큰 형님은 그렇게 군대에 가게 됐다.

나 또한 어려서부터 그런 집안 분위기에서 자라 ‘김일성에게 무조건 충성해야 한다’는 가정교육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충성심이 배어 있었다. 내가 열한 살 때 모란봉 옆 만수대 언덕에 조선 혁명박물관이 세워졌다. 그 앞마당에 북한에서 제일 큰 김일성 동상이 건립됐다.

내가 다니던 대동문 인민학교에서 그곳까지는 도보로 10여분 거리였다. 교실 창문으로도 동상이 보일 정도였다. 난 다른 아이들처럼 새벽에 잘 수 없었다. 새벽마다 깨끗한 수건과 청소 도구를 갖고 그 동상을 찾았다. 그리고는 동상 앞에 도착해 먼저 엎드려 절을 했고, 30분 동안 그 주변을 먼지 한 점 없이 쓸고 닦았다. 그렇게 사계절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자발적으로 새벽마다 찾아갔다.

그런 내 행동이 당 고위 직위자에게까지 보고됐다. 1975년 6월의 어느 날 난 평양 학생 소년궁전의 한 접견실로 호출을 받았다. 몇몇 간부의 안내로 간 접견실에는 이미 여러 학생과 사람들이 와 있었다. 나처럼 모두 각 분야의 모범생으로 뽑혀온 사람들이었다. 그날 나는 김일성으로부터 ‘김일성 소년 영예상’이라는 금 훈장을 받았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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