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난 일은 저녁에도 일어난다(朝あることは晩にもある)’는 일본 속담이 있다. 한 번 벌어진 일은 또 벌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일본 정부가 대한(對韓) 수출규제를 선포한 뒤로 뇌리를 떠나지 않은 말이다. 이번 사태가 수습되더라도 일본의 수출규제 재발 가능성은 이제 배제할 수 없다.

한국은 개발연대 이후 첨단 부품·소재를 일본에 의존해 왔지만 오늘과 같은 사태를 거의 우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상의 이점에 가성비도 좋은 일본산 부품·소재의 안정적 공급에 신뢰를 보냈다. 한국은 자체 부품·소재 개발에 시간과 자본을 쏟는 대신 일본에 의존하면서 최종재 생산에 몰입해 압축성장을 이뤘다. 그런데 그 신뢰는 무너졌다.

일본의 선포는 한국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 분야를 타깃으로 삼아 한국 경제가 하강국면에 들어선 때를 골랐다는 점에서 매우 도발적이다. 북한 비핵화 이슈를 둘러싸고 사실상 문재인정부가 외교 역량을 남북 및 한·미 관계에 몰두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미·일로 상징되는 동아시아의 중요한 우방인 한국의 뒤통수를 쳤다.

정작 일본 정부는 모르쇠다. 수출관리 차원에서 운용 방침을 재검토하는 것이라고 둘러댄다. 안전보장무역제도는 세계무역기구(WTO)의 호혜평등원칙, 수출제한 금지원칙 등에 반하지만 ‘자국의 안전보장상 중대한 이익을 보호할 필요가 있는 경우’(GATT 21조)는 예외로 인정된다. 한국이 일본의 안전보장에 대체 어떤 위해를 가했나. WTO에 제소할 근거는 분명하다.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WTO 제소 과정은 시간싸움이다. 일본산 부품·소재 공급엔 차질은 불가피하다. 이번 수출규제는 수출금지가 아니라 절차를 까다롭게 하는 것이다. 다만 절차 규제는 대표적인 인위적 규제로, 자의적인 판단이 개입하면 심한 경우 수출 불허도 예상된다.

더 큰 문제는 한국 정부가 대책으로 내놓은 부품·소재 대체 수입처 확보 및 국산화다. 대체 수입처가 있다고 해도 공급가 인상은 물론 정량을 제때 공급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국산화는 더더욱 쉽지 않다.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이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완수해야 할 과제가 됐다.

이번 사태의 배경엔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의 서로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이 작용했다. 방아쇠는 지난해 10월 대법원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로써 당겨졌다. 사법 판단 뒤에 선 문 정부는 이후 약 8개월 동안 관련 협의를 요청하는 일본 정부에 사실상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전쟁할 수 있는 국가를 지향하는 아베의 일본과는 대화조차 마뜩잖았던 것일까.

아베의 선입견은 한술 더 떴다. 그는 한국이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을 파기하는 것으로 보고 국제법 위반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국가 간 조약의 준수 등을 다룬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이 나온 것은 69년이니 한·일 기본조약은 적용 대상이 아니다. 국가 간 체결한 조약이라도 하자가 있으면 수정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아베는 과거를 외면한 채 국제법 운운하며 떼만 쓰는 나라로 한국을 낙인찍고 강수를 뒀다.

이미 저질러진 사태 앞에서 문 정부를 탓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앞으로 해법의 주도권을 쥐자면 감정적인 반일 구호보다 절제되고 치밀한 전략이 절실하다. 문 정부는 미국에 중재를 요청한 모양이나 기대난이다. 해방 후 한·일 관계가 요동칠 때 미국의 중재가 종종 있었지만 역효과가 더 컸다. 65년 기본조약, 2015년 위안부 합의 등 적당한 봉합 탓에 내재된 문제들은 이후 수시로 불거졌고 대립과 갈등은 되레 고조됐다.

문 정부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주변국 외교 전반에 대한 전략을 재점검해야 한다. 대외 의존적 경제 구조도 수정이 불가피하다. 65년 기본조약의 한계를 보완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다만 문 정부가 금과옥조로 내세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한·일 관계, 대일 외교도 중요한 지렛대가 될 수 있음을 거듭 명심해야 한다.

내 주장을 관철하자면 상대 주장도 경청해야 한다. 그 안에서 제3의 길을 찾는 게 참된 지혜다. 그게 거래의 기본이자 외교의 근본이다. 무엇보다 아베 정권과 일본 시민사회를 한 데 묶어 적대감을 표출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 바야흐로 시대는 새로운 한·일 관계를 원한다.

조용래 광주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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