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유대열 (3) 특수부대서 인정 받으며 잘나가던 어느 날…

작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분 박탈로… 평생 노역에 시달리다 죽을 신세로 전락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 중 발생한 일명 ‘도끼만행사건’ 모습. 국민일보DB

이듬해인 1976년 8월, 북한에는 준전시 상태가 선포됐다. 판문점에서 8·18 도끼만행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방송에선 연일 ‘6 25전쟁 이후 북한 역사에 가장 엄중하고 준엄한 정세가 조성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장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전군에 전투태세가 발령됐고, 전국에 동원령도 발포됐다. 공장과 농장, 대학에서 수많은 청년이 군에 자원입대했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 내 나이는 만 15살에 불과했다. 당시 나는 ‘전쟁이 일어날 텐데,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학교가 아닌 총을 들고 ‘어버이 수령’을 결사옹위하는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북한 해상저격여단(해군특수전 부대)에 들어갔다.

그 후로 8년간 군 복무를 했다. 훈련이 너무 가혹하고 힘들어 3년째부터 후회가 밀려왔다. 나이도 가장 어렸고 체격도 제일 작았다. 그러나 특수부대는 요행이 통하지 않았다. 매주 토요일마다 34㎏의 배낭과 무기를 휴대한 채 12시간 동안 80㎞를 주파해야만 하는 행군을 했다.

내가 쓰러질 때면 선임들이 나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데려갔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지지 않으려 한 나의 악바리 근성이 부대 내에 알려지면서 모범생으로 소문이 났다. 그렇게 3년 만에 최고 군관학교인 정치 군관학교에 갈 수 있는 특혜를 보장받았다. 출신 성분이 좋은 가문 태생이었는 데다 특수부대에서 최연소 모범생으로 뽑힌 내게 어찌 보면 그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렇게 정치 군관학교 입학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고위직에 있었던 작은 할아버지께서 온 가족과 함께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 것이다. 당시 특수 8군 장군으로 계셨던 아버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외딴 시골의 상하차 공(하역부)으로 추방되셨다.

북한은 철저한 신분(성분)제도가 실시되는 나라로, 본인이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런 경우 인생의 모든 길이 막혀버리게 된다. 제대하면 아오지 탄광에서 일생 노역에 시달리다 죽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그때부터 난 인생을 포기한 채 매일 같이 술로 밤을 지새우는 삶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본 영화 한 편이 나를 다시 일으켰다. 당시 북한 TV에서 방영하던 ‘만수대 텔레비전’을 통해 ‘참된 사람의 이야기’라는 소련영화를 봤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투기 추락 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잃은 소련군 조종사 이야기였다. 그도 나처럼 한때는 술에만 의지해 살았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전투기를 몰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어려서부터 외우고 공부한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고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주체사상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난 매일 4시간씩 잠을 잤다. 토요일 강행군을 한 날이든, 얼음을 깨고 바다에 들어가는 냉한 훈련을 한 날이든 4시간 이상을 자지 않았다. 솔선수범하며 훈련을 받았고 군인 사상교육시간에는 항상 10점 만점을 받았다. 그렇게 군 복무 8년 차가 된 1984년 3월 초 어느 날, 여단 최고 실권자인 정치위원이 나를 불렀다. 나를 즉시 제대시켜 평양에 있는 대학에 보내고, 민족 간부로 양성하라는 ‘김정일 명령서’가 내려왔다는 것이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이런 특혜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싶었다. 그 명령서를 받고 정치위원 사무실을 나오는데 하늘이 열리는 것 같았다. 남보다 열심히 살면 남보다 잘 된다는 나의 ‘주체 인생관’을 더욱 확신하게 됐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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