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그 곳에선 무슨일이… 신앙뿌리 찾아 떠나보자

크리스천을 위한 여행 가이드

성경전래지기념관에는 조대복(왼쪽)과 머레이 맥스웰 함장의 처음 만나는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충청남도 서천군은 서해안과 금강을 특색으로 한 관광지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2016년 9월에 개관 후 10만 명 가까이 찾은 성경전래지기념관은 꼭 가볼 만한 곳이다. 해안가 끝 서천마량포구 인근에 위치한 이 기념관은 한국 최초로 성경이 전래된 역사를 담고 있다.

서천 마량포구는 한국 최초로 성경이 들어온 곳이다.

때는 조선후기 1816년(순조 16년). 마량진 갈곶에 영국 함선 알세트호가 일시 정박한 것이 시작이었다. 낯선 배를 조사하고자 조선의 관리 조대복이 선상에 올랐다. 그곳에서 선장 머레이 맥스웰 함장과 만났다.

처음 보는 외국인이었다. 말이 통할 리 없었고, 둘은 눈짓 몸짓으로 소통했다. 서로에게 적의가 없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조정에서 알게 되면 참형을 면치 못할 것을 걱정한 조대복은 눈물을 흘리며 이곳을 떠나달라고 맥스웰 함장에게 부탁한다. 간곡한 부탁을 물리칠 수 없었던 맥스웰 함장은 떠나면서 조대복이 관심을 보였던 책을 선물로 주는데, 그것이 바로 킹제임스 성경 초판이었던 것이다.

당시 알세트호가 대포를 실은 무장 함선이었다는 점, 그리고 다른 지역의 조선 군대는 외국 함선의 등장에 무조건 무력으로 대응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두 사람의 우정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다. 운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날 기념관을 찾은 김시온(20, 서울 용산구)씨는 “200년도 더 전에,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낯선 사람과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용기를 다시 보게 된다”며 “나그네를 환대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이미 삶으로 보여주던 이 지역 사람들의 너그러운 품 때문에 한국 최초로 성경을 받아들이는 축복의 땅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뿐만 아니라, 21세기 세계 시민이라면 꼭 갖추어야 할 환대의 덕목을 이 기념관이 담고 있는 것이다.

기념관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야외 기념공원이 있다. 이곳에는 당시 이곳에 정박했던 함선의 조형물을 볼 수 있다. 함선 위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문득 두 사람의 우정이 부러웠다. 낯선 모양의 함선, 괴상망측한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오늘의 한국 기독교에 가장 필요한 신앙의 결기가 아닌가.

그곳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아펜젤러순직기념관이 있다. 한때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죽음을 두고 ‘순교’인지 ‘순직’인지를 따지는 논쟁이 있었다. 그가 선박 사고로 숨졌기 때문이다. 그 장소가 바로 이곳 기념관에서 보이는 어청도 인근이다.

기념관 3층에서 망원경을 통해 그의 순교·순직 지점을 볼 수 있다. 기념관을 둘러보며 그의 굵직굵직한 삶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미국 감리교에서 파송한 선교사로서 배재학당을 설립한 교육가이자 인천내리교회, 정동제일교회를 세운 목회자. 그 어떤 선교사보다도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무덤에 묻힐 수조차 없었던 삶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어청도 인근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한반도 방방곡곡을 바삐 오가며 복음을 전하다가 맞이한 갑작스러운 죽음, 순교일까, 순직일까?

그를 소개한 기념관의 문구 중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가난한 소작농, 고아, 가부장적 문화에 의해 착취당하는 여성 등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이를 해결하려 노력했다.’ 조선말기, 세도정치와 탐관오리의 수탈로 고통받아 온 백성들의 암울한 삶에 아펜젤러가 전한 복음은 한줄기 빛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서천군은 지자체 차원에서 이 지역 일대의 성역화 사업을 추진 중이다. 나그네를 환대하고, 약자를 일으켜 세우는 역사를 전통으로 이어가고자 함이다. 이 사회의 공공기관이 복음의 사회적 가치를 알아본 것이다. 우리는 그 복음을 오롯이 이해하고 있으며 전하고 있을까.

강화(江華)는 원래 김포(金浦)의 일부였다. 침강작용을 거쳐 육지에서 분리돼 섬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섬은 평소에는 변방으로 유배되어 있다가, 바다로부터 도읍으로 향하는 관문이자 보루였던 탓에, 역사의 거친 굴곡마다 주연으로 등장했다.

몽골 침략(1231)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강화도조약(1876). 섬이란 서럽기 마련이다. 서러움의 정서는 강화 곳곳에 배어 있다. 강화 사람들은 바다에서 ‘웅 웅’ 바람이 불어오면, 손돌이 서러워서 우는 소리라고 했다.

설화에 따르면 손돌은 강화에 사는 뱃사공이었는데, 몽골군을 피해 달아나는 고려 임금과 신하들을 배에 태웠다가 억울하게 죽었다. 강화 바다는 폭이 좁아 물살이 거칠고 안개가 자욱한 게 특징이다. 임금은 패주의 꼴이 되어서도 거친 바다의 무엄함을 꾸짖었고, 신하들은 손돌의 목을 베어 임금의 언짢은 심기를 달랬다. 강화 주민들은 지금도 바닷바람을 손돌바람이라 부른다.

강화도와 육지 사이에 강화대교, 초지대교가 놓이면서 도(島)란 말이 무색해졌다. 인간의 개발 논리가 자연이 육지로부터 떨어뜨려 놓은 섬을, 다시 육지와 이어놓았다. 강화는 가까운 여행지로 주목받으면서 해마다 관광객이 늘고 있다. 버려진 집도 는다. 기자가 만난 숙박업소 주인들은 하나같이 다리가 놓이고 당일치기 여행이 가능해지면서, 극성수기 빼고는 장사가 되지 않는다고 울상을 지었다. 버려진 집들은 그대로 폐가가 되거나, 뜨내기손님을 받는 카페나 음식점으로 변하고 있다.

강화읍성공회성당.

강화에는 오래된 교회가 많다. 개항기 외국인들이 무역할 상품과 함께 복음(福音)을 들고 섬을 찾았기 때문이다. 감리교회와 성공회성당이 유독 많다. 강화 주민들은 프랑스·미국 함선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탓에, 그들 나라 사람이 가지고 온 복음에는 거부감을 보였다. 대신 영국의 감리교와 성공회를 받아들였다. 교산감리교회(1893) 강화읍성공회성당(1900) 온수리성공회성당(1906)이 대표 교회로 손꼽힌다.

온수리성공회성당. 12개의 기둥은 12사도를 상징한다.

온수리성공회성당(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52호)은 기독교인뿐 아니라, 일반 관광객도 많이 찾는 명소다. 서양과 우리나라의 건축 양식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개항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성공회 선교사들은 토착화를 중시했다. 바실리카양식(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궁궐이나 법정 등에 쓰이던 장방형 평면 건물)에다, 강화에서 자란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기와를 올렸다. 밖에서 볼 때는 지붕 위에 담백하게 올려진 십자가만이 예배당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온수리성공회성당은 유독 단출하고, 평범하고, 고요하다. 기자는 교회를 둘러보며, 아무래도 예배당은 비우면 비울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장식이 요란한 대성당이나 휘황찬란하고 거대한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 왜인지 복음을 강요받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반면 단출한 예배당은 복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교회는 요란하지 않은 대신 나무향이 강하다. 열두 사도를 상징하는 목조 기둥 열두 개에 세월이 스미면서 발생한 나무 향기는 글이나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다. 온전히 예배당을 찾아온 기도자의 몸으로 비벼야만 맡을 수 있다. 예배당에 충분히 앉아 기도를 올리다 보면, 오래전 육지로부터 유배된 섬의 서러움과 격렬한 전투 중 죽어간 사람들의 원한이 손돌바람을 타고 느껴진다.

강화의 역사를 알고 있어서 그런 건지, 자기 안에 묵혀 둔 서러움과 원한의 감정이 떠오른 건지는 알 수 없다. 누구의 역사이든 간에, 온수리성공회성당은 서러움과 원한, 복음의 역사를 한눈에 증언하고 있다.

◇온수리성공회성당 =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성당. 강화 온수리에 진료소를 세우고 의료봉사를 했던 로스(A. F. Laws) 선교사의 헌신에 감화 감동한 주민들이 직접 땅을 헌납하고, 건축자재를 사서 지었다. 1919년 삼일운동 당시 강화 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길38번길 14

◇강화읍성공회성당 =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 성당. 2층 형태의 한식 목조건물로, 배 모양의 예배당 터는 방주를 형상화했다. 연꽃 문양 대신 십자가 문형을 새긴 범종과 교리가 적힌 주련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길27번길 10

◇교산감리교회 = 강화 최초의 감리교회. 존스(G. H. Jones) 선교사의 복음 전도와 김상임 전도사의 토지 주택 헌납으로 세워졌다. 김상임 전도사는 원래 선교 활동을 방해하던 고을 양반이었는데, 성경을 연구하던 중 회심하여 교회 설립에 앞장섰다. 김상임 전도사의 회심 사건과 우리나라 최초의 선상 세례 사건 등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강화 감리교의 어머니 교회라 불린다. 인천 강화군 양사면 서사길 296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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