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3년 내 죽으면 열녀 못 된다”… 청상과부, 예수 만나 구원받다

명문가 ‘과부’ 유을희 전도사와 논산·유성

유을희 전도사가 열일곱 나이에 시집갔던 논산 노성면 백일헌종택(이삼 장군 고택). 배재학교를 다니던 남편이 죽고 생후 100일인 딸마저 죽자 환상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이후 경성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첫 집회를 이 고택 앞마당에서 행하게 된다. 지금은 충남민속자료 7호이다.

지난 1일 충남 논산시 강경읍 강경성결교회 친목실. 임종한 목사(논산 노성교회)와 이연형 대전 유성교회 장로(대전 을희사회복지재단 천양원 원장)가 오랜만에 만나 유을희 전도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을희 전도사 (1904~1999)

유을희는 충남 부여 출신으로 논산 노성면 명문가 이씨 집안에 시집갔으나 연이어 남편과 자식을 잃고 실의에 빠졌을 때 예수 믿고 구원받은 교역자이자 사회사업가이다. 그가 출가한 시집, 즉 백일헌종택(이삼 장군 고택)은 충남 민속자료이기도 하다.

이연형 천양원 원장(왼쪽)과 노성교회 임종한 목사가 ‘노성교회 약사’를 들고 찍은 사진.

“제가 1990년대 초 노성교회에 부임해 산기도 끝에 교회 건축을 시작했어요. 시골교회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죠. 새벽기도가 끝날 즈음이면 어김없이 유 전도사님이 제게 전화하셔서 ‘얼마나 힘들어’ 하고 위로했어요. 그 한마디에 먹먹해지곤 했습니다.”

1952년 유을희 전도사가 설립한 고아 시설 ‘천양원’. 입구에 예배당부터 세웠다.

유을희는 당시 ‘고아’ 시설 천양원(1952년 설립) 원장으로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는데도 정신이 없었다. 모든 것이 모자랐다. 그런 어머니를 ‘아들’ 이연형 장로가 따라다니며 챙겼다.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끝나는 어머니의 하루였다.

한 외국인 선교사가 천양원을 방문해 절구질하는 모습을 취했다. 1960년대로 추정된다.

“그때 유 전도사님이 노성교회 건축을 위해 지인들에게 전화하셨어요. ‘나 죽으면 부조할 것 아닌가. 그거 좀 일찍 하시게’라고 부탁해 수백만원씩 모아 주셨죠. 1992년 봄 사회복지에 이바지한 공로로 호암상을 타셨는데 그때 상금이 세금 떼고 3700만원인가 됐어요. 그중 1000만원 넘게 성전 건축에 쓰라고 내놓으시기도 했고요. 눈물 나죠.”

옆에 있던 이 장로의 눈가가 어머니 생각에 촉촉해졌다. 호암상을 받던 그해 10월 유을희는 아들 이 장로에게 원장직을 부탁했다. 어머니의 수족이었던 그가 그 일을 왜 모르겠는가.

논산 노성교회 모습. 유을희 전도사가 강경성결교회 도움을 받아 설립했다.

노성교회는 1938년 강경성결교회 지원을 받아 유을희가 설립했다. 시댁(백일헌종택)이 있던 주곡리에서 예배를 드리던 유을희는 예배자가 늘어나자 50여리(20㎞) 떨어진 대처의 강경교회에 요청, 노성교회를 출범시켰다. 당시 강경교회 목사는 성결교회 지도자 오영필(1905~1988)이었다.

“어머니가 그해 3월 경성신학교(서울신대 전신)를 졸업하셨어요. 시댁 앞마당에 부흥 집회를 하고자 오 목사님을 모셨어요. 오 목사님이 나팔 찬송가를 부르자 군중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부흥회 후 노성 읍내로 진출해 전도했죠. 당시 객사 건물을 집회처로 삼았더니 주재소 순사들이 쫓아내더랍니다.” 이 장로의 설명이다.

지금 노성교회는 옛 객사(현 면사무소) 옆 언덕배기에 자리하고 있다. 수백 년 느티나무가 예배당 뒤편에 서 있어 노성이 옛 고을임을 짐작케 한다. 개척 당시 일제가 신사를 지으려고 했던 곳이다.

노성교회 설립 이듬해 면사무소 마당에서는 ‘한국의 무디’로 불리는 이성봉(1900~1965) 목사가 부흥회를 이끈다. 하지만 집회 한 시간 전까지 북치고 나팔 불며 집회 광고를 해도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다. 유을희가 안절부절못하다 북과 나팔을 내려놓고 “주님, 전 모릅니다. 사람들을 재촉하여 보내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자 순식간에 마당이 꽉 찼다. 이날 밤 70여명이 결신했다.

“가문 위해 죽어야”… 예수 환상 보다

앞서 지난달 31일 이른 아침 백일헌종택 앞마당. 마을은 지금도 이씨 가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 18세기 양반가의 위세를 느낄 수 있었다. 고택 앞에 연꽃 습지가 조성됐고 옛 우물이 복원됐다. 이 고택은 이삼 장군이 영조 때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하사받은 집이다.

유을희는 열일곱에 세 살 연하 공주중 학생 이계정과 혼인했다. 그리고 남편은 이내 서울의 미션스쿨인 배재학교로 진학해 더 멀어졌다. 한때 유을희도 서울 근화여학교(덕성여고 전신)에 편입해 몇 달 재밌게 공부했으나 종가며느리라는 이유로 다시 내려와야 했다.

그러나 남편이 세브란스의전(연세대 의대 전신) 입학시험 3개월을 앞두고 맹장염으로 죽고 만다. 이때 유을희는 임신 9개월째였다. 남편 소식에 탈진한 그도 눕고 말았다. 친정아버지로부터 “아이라도 낳고 죽어야 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위급했다. 그는 한 달여의 사투 끝에 딸을 낳았다. 하지만 그 귀한 딸도 폐렴으로 100일 만에 죽고 만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는’(롬 8:30) 듯했다.

유을희는 자신도 가문을 위해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늑막염과 정신이상 현상에 시달렸다. 이를 눈치챈 시고모는 “3년 이내에 죽으면 열녀가 못 된다”며 가문의 명예를 염려했다. 남편의 두 번째 기일 무렵. 그는 질병을 고쳐 주는 예수의 환상을 보았다. 다행히 이런 며느리를 시부모가 구박하지 않았다. 성품이 좋은 분들이었다.

1932년 가을. 유을희가 양자 삼은 큰 시숙 장남을 데리고 강경읍내 병원에 갔을 때 우연히 전도지 한 장을 받는다. ‘제일 강사 이성봉 목사 옥류봉 강경성결교회 부흥 집회. 누구나 오라!’. 그는 ‘누구나’라는 말에 이끌려 시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그 집회에 참석했다. 원망 가득한 삶이 순식간에 은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참석자들은 양반집 규수가 왜 저리 통곡하는가 구경할 정도였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극장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자 시어머니가 “나도 가볼 걸 그랬다”라고 위로했다. 그 시어머니는 성경 100독을 하고 돌아가셨다.

‘고아’ 거두어 예수 자녀 만들어

이후 유을희는 ‘이 좋은 것을 나만 믿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시댁 식구와 마을 사람들을 전도했다. 지방신학교와 경성신학교에서 공부도 했다. 그의 영성과 열정으로 노성교회는 부흥했고 공주교회가 이어 설립됐다.

“이 길이 공주 가던 신작로였습니다. 노성교회 예배가 끝나면 60~70여리를 걸어 공주예배당에 가서 오후 예배를 인도하셨어요. 요즘 그런 신앙이 어딨겠습니까.”

현재 천양원과 남아 있는 종탑.

이 장로가 옛 신작로를 가리키며 어머니를 추억했다. 사실 이 장로는 논산 황산벌이 고향으로 6·25전쟁 직전 호열자(콜레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됐다. 그가 전쟁통에 강경읍내를 배회하고 있자 유을희가 그들 형제를 거두었다. 그것이 1952년이었고 ‘천양원’의 시작이었다.

유 전도사가 처음 예배당을 찾았던 옛 강경성결교회. 리모델링을 통해 복원했다.

요즘 옥녀봉 아래 강경성결교회 옛 예배당은 리모델링되어 순례자를 맞는다. 유을희가 처음 발을 디딘 곳이다. 이 장로와 함께 찾은 1일 오전. 한 가족이 마룻바닥에 앉아 문화해설사로부터 한창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 장로는 어머니가 생각나는 듯 한동안 침묵했다.

논산·대전=글·사진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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