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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림의 명화로 여는 성경 묵상]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로렌조 기베르티 ‘이삭의 희생’

1401년, 청동, 45x38cm, 이탈리아 피렌체 바르젤로 국립미술관.

전 유럽을 처참하게 휩쓸었던 페스트가 1400년 다시 이탈리아를 덮쳤으나 큰 희생 없이 지나갔다. 이를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 피렌체에서는 산 조반니 세례당의 북쪽 문에 설치할 청동 부조 경연대회를 열었다.

시험 문제는 ‘이삭의 희생’이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조각가와 미술가들이 참여했다. 최종 결승에 오른 사람은 당시 최고의 조각가로 유명한 23세의 브루넬레스키와 금세공업자의 아들인 22세 기베르티였다. 두 사람의 작품은 우열을 가리지 못할 만큼 훌륭했다.

경연에서는 주제에 담긴 순간의 긴박함을 강조한 브루넬레스키를 제치고, 고대 작품에 견줘 손색이 없을 만큼 정교하게 인체의 아름다움을 조각한 기베르티가 승리했다. 기베르티는 21년간 혼신의 열정을 다해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28점의 청동 부조로 북문을 완성했다.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안겨준 ‘이삭의 희생’과 똑같은 작품도 북문의 부조 중 하나이다. 작품의 정면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로 내려치려 하자 오른쪽 하늘에서 천사가 이를 제지하고 있다. 화면 왼쪽 아래에는 양을 잡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기베르티가 제작한 북문이 너무 훌륭해 다시 동문의 제작도 맡았고, 27년이나 공들여 황금으로 입힌 ‘구약 10장면’ 청동 부조를 완성했다. 기베르티는 피렌체 산 조반니 세례당의 두 문을 제작하는 데 48년이라는 그의 전 생애를 들였다. 이 문을 보고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으로 손색이 없다고 극찬을 해 지금까지 ‘천국의 문’으로 부른다. 현재 외부 동문에는 복제품이 설치돼 있고, 진본은 보존을 위해 바로 옆에 있는 그 유명한 두오모 성당에 전시돼 있다.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어 이삭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늦둥이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물로 바치라는 끔찍한 명령을 내리신다. 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가는 이삭이 나무와 칼과 불씨는 가져가면서 왜 제물에 쓸 양은 가져가지 않느냐고 묻자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

아브라함이 산에 올라가 제단을 쌓고 이삭을 결박하고 칼로 죽이려 하자 천사가 나타나 제지했고, 바로 옆 나무 덤불에 걸려 있는 산양을 제물로 바쳤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창 22:1)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셨는데, 야고보서에서는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약 1:13)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해보기 위해 아들을 죽이라고 하셨을까. 야고보서의 ‘시험’은 ‘유혹하다(tempt)’란 뜻으로, 우리가 유혹에 빠져 죄짓고 시험에 들었다고 하지 말라는 의미다.

반면, 아브라함의 ‘시험’은 ‘입증하다(prove)’의 뜻을 포함한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 11:17~19) 아브라함은 신약에서 예수에 의해 완성될 부활의 믿음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데 맹목적으로 따르는 순종이 아니라 현실적인 실체로서의 믿음이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예수께서 약속하신 부활의 영광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로렌조 기베르티 (Lorenzo Ghiberti, 1378~1455)

가업인 금세공 일을 하다가 1401년 피렌체 산 조반니 예배당의 청동문 경연에서 당대 최고 조각가 브루넬레스키와 최종 결승에 올라 28장면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새긴 북문을 21년 만에 완성하고, 다시 동문에 일생의 역작 ‘천국의 문’을 27년 만에 완성했다. 기베르티는 미술 이론에도 밝아 정교한 조각 기법을 해설한 문헌 ‘코멘타리’를 남겼는데, 이를 통해 그의 깊은 신앙심과 예술가로서의 품격을 접할 수 있다.


전창림 <홍익대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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