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인이 사람들 손에 끌려 나와 군중 앞에 내던져집니다.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입니다. 돌에 맞아 죽을 상황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얼굴에 노기를 띤 채 예수님께 묻습니다. “자,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소?” 즉답을 피하고 땅에 글씨를 씁니다. 군중의 분노는 예수님의 손끝을 따라 멈칫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시오.” 예수님의 눈길은 사람들에게로 향하지 않습니다. 다시 손가락으로 땅에 글쓰기를 계속합니다.

잠시 후에 땅에 돌 떨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툭’. 그 소리에 이어서 같은 소리가 들립니다. 툭, 툭, 툭…. 어느새 모두가 다 발길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어떻게 군중의 분노를 이렇게 가라앉힐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군중의 허위의식 중심에 뛰어들어 죄로 가득한 그 중심에 불을 밝힙니다. 짙은 어둠 속에 익숙한 벌레가 갑자기 쏟아지는 햇볕에 놀라 움츠러들듯 군중은 되돌아서 죄의 보금자리로 가고, 분노의 파도에 휩쓸렸던 여인은 목숨을 건져 제 길로 갑니다.

이번에는 예수님 자신이 분노의 파도에 휩쓸렸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지 못하고 돌아섰던 자들이 드디어 예수님을 체포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군중의 거센 함성은 모든 이성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습니다. 어떻게 해서 함성이 이토록 커졌을까요. 누가 먼저 지르기 시작한 고성입니까. 빌라도가 고민합니다. “바라바와 예수 둘 중 한 사람을 특사로 석방시켜주겠소.” 군중은 이구동성 바라바를 택합니다. 등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조롱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남을 구원하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원해보시지.”

예수님은 마지막 호흡을 몰아쉬며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고 선언합니다. “다 이루었다.” 인간의 모든 분노를 한몸에 짊어지고 제물이 되시더니 그 제물이 온전히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스스로 선포합니다. 그 선포는 곧 죄의 분노를 소멸시켰음을 확인합니다. 아담과 가인으로부터 흘러온 죄와 분노, 떼려야 뗄 수 없는 죄의 분노가 사랑의 용광로 속에서 녹아내리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은혜의 긍휼이라는 옷자락으로 죄의 분노를 뒤덮어버리셨습니다. 인류 역사의 분기점이자 곧 BC와 AD의 갈림길입니다.

이후로 죄 없는 자들이 죄 있는 자들의 손에 희생당하는 일은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보기에 별 효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에 얼른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진정으로 주라고 고백한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사명을 실제로 ‘다 이루었습니다’. 사도들의 생애를 통해 그리고 끊임없는 믿음의 행진을 통해 다 이룬 일들이 산더미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기록의 끝에는 후렴처럼 기록된 말이 있습니다. “분노를 그치게 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분노를 그치게 한 일은 없습니다. 어떤 종류의 힘이건 힘으로 인간의 분노를 그치게 한 일은 없습니다. 힘과 힘이 부딪치는 곳마다 더 큰 분노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외면하는 곳마다 복수의 칼을 들고 매복한 자들이 눈을 번뜩이며 기회를 노리는 위험한 길이 가로놓여 있을 뿐입니다. 결국 역사는 반복되고 인류가 역사에서 배우는 것은 역사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공권력의 일차적인 책임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분노를 멈추고 집단과 집단 사이의 분노 수위를 낮추는 일입니다. 폭력보다 법이 먼저여야 하고 전쟁보다 외교가 먼저여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합법적인 폭력을 독점한 국가권력이 자의적으로 행사되면 나라 안의 분노를 분출할 희생양을 찾는 데 주력합니다. 민족과 국가라는 이름으로 대중의 분노를 폭발시켜 끝내 전쟁으로 치닫습니다. 누가 희생양이 될까요? 그리고 정말 분노가 그치게 될까요?

조정민 베이직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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