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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도 섬김의 리더십’ 국난 때 솔선하며 협력 이끌어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의 모델’ 손정도 목사의 신앙과 삶


한·일 관계가 급속히 악화하면서 국가의 위기관리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이때, 탁월한 국가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실감하고 있다. 무한경쟁 시대에 무한전략으로 신뢰와 안정을 가져올 수 있는 지도자, 우리가 꿈꾸는 지도자다. 이런 위기 국면에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와 손정도기념사업회는 13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손정도(1882∼1931·사진) 목사의 신앙과 삶’을 주제로 한국교회사포럼을 연다. 유명 대학의 교수들이 발제자로 참여하는 이번 포럼을 준비 중인 교계 인사들을 지난 1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종교국 회의실에서 만났다.

참석자

이철 감독 (강릉중앙감리교회 담임,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동부연회 감독)
손명원 장로 (손정도 목사의 손자, 전 쌍용자동차 사장)
강무영 장로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대표회장)
이강전 장로 (손정도기념사업회 상임대표)

사회=윤중식 국민일보 부국장


“손정도 목사의 삶과 신앙은 이제 한국교회와 사회의 나침반이 될 것입니다.” 11일 좌담회에 참석한 교계인사들은 애국지사이고 독립운동가인 손정도 목사의 생애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했다. 왼쪽부터 손 목사의 손자인 손명원 장로, 이철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동부연회 감독, 강무영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대표회장, 이강전 손정도기념사업회 상임대표. 강민석 선임기자

-특별한 포럼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이번 포럼의 주제 인물인 손정도 목사를 소개해 달라.

이철 감독=손정도 목사는 감리교 목사로 평생을 산 분이다. 1882년 평북 강서에서 태어났고 숭실중학교를 다니면서 평양대부흥을 체험했다. 이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선교사로 파송돼 선교 활동을 하던 중 일제에 체포돼 심한 고문을 당했다. 전남 진도에 유배됐을 때 바울처럼 옥중에서도 많은 결신자를 세웠고, 풀려난 이후 정동제일교회를 담임하면서 국내 최대의 교회로 부흥시켰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했다. 임시정부 의정원의 의장으로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 선포한 분이기도 하다. 안창호 선생과는 호형호제하면서 임시정부를 이끌었고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섬겼다. 이후 중국 지린에서 선교 활동을 하면서 안창호 선생과 함께 민족의 이상촌을 운영했는데, 일제의 거센 탄압으로 결국 마을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일본 전향을 끝까지 거절하다가 49세의 나이에 순교했다. 감리교를 넘어 한국교회 전체, 민족과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이 감독께서 잠시 소개해주셨는데 민족지도자로서 삶이 드러난다. 그런데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

손명원 장로=손정도 목사는 독특했다. 그분의 삶의 신앙과 철학은 ‘걸레 정신’이다. 걸레처럼 자신을 철저하게 낮췄고, 걸레인 자신을 회개로 늘 깨끗하게 준비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실천한 분이다.

분명 빛으로 살았지만 당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민족적인 결단이 필요할 때 그 중심에서 일했지만 걸레처럼 모든 일을 이루면 뒤로 물러서서 섬김에 헌신을 다한 분이었다. 3·1운동을 준비할 때 걸레 정신으로 섬겼고, 임시정부 수립과 임정 시절 때 역시 남남갈등으로 서로가 반목하며 의견이 충돌되고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분의 걸레 지도력이 문제를 풀어내는 해결사 역할을 했다. 썩은 한 알의 밀알 정신, 예수님을 닮은 십자가 지도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가 만나고 싶은 인물들을 손정도 목사의 전기를 만나면 함께 만날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떤 분들인가.

강무영 장로=그렇다. 손 목사는 기독교 평신도 지도자를 세운 분이다. 앞에서도 말씀해 주셨지만 안창호 선생에게 영향을 끼쳤고 민족지도자였던 조만식 장로와 함께 공부하며 민족 사랑의 정신을 나눴다. 이승훈 선생에게는 3·1운동의 중심에서 섬기도록 조력자 역할을 했다.

임시정부 때 헌법 제정에 핵심 역할을 했던 조소앙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을 상해에 오도록 신앙으로 권고했고 김구와 여운형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인 분이 손정도 목사였다. 특히 국권을 상실한 채 청소년기를 지내던 유관순, 김상옥, 김성주 등에게 하나님 사랑, 나라와 민족 사랑을 가르치고 영향을 준 것도 손정도 목사였다. 이 밖에 조병옥을 비롯한 많은 기독교 평신도지도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실천하며 모범을 보인 분이 손정도 목사였다.

-당시 고종과 왕족에게, 그리고 손병희 선생에게 영향을 끼친 분이 손정도 목사라던데.

이강전 장로=손정도 목사가 정동제일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교회 주변에 민가(民家)가 없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유일했고 덕수궁이 교회 가까이 있었다. 그때 고종이 고립무원인 덕수궁에 머물면서 손정도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가끔 교회에 출석했고 손정도 목사 역시 고종을 찾아뵙고 국사(國事)를 논의하고 대한제국의 미래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함께 나눴다. 이때 고종의 아들 의친왕과 파리평화회의에 함께 가기로 모의하기도 했다. 손병희 선생과도 관련됐다. 3·1운동 당시 천도교의 적극적인 참여와 전국적인 운동을 펼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손병희 선생을 설득해 3·1운동의 대표로 세우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독려한 분이 손정도 목사다.


-손정도 목사는 정동제일교회를 국내 최대의 교회로 이끌었다. 교회 부흥의 비결이 무엇인가.

이 감독=그분은 가는 곳마다 부흥의 불길을 활활 타오르게 한 분이다. 그분의 독특한 설교 방식과 목회 방식이 있었다. 일명 ‘손정도식 설교’와 ‘손정도식 목회’가 그것이다. 그분의 설교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회개와 성령의 역사’이다. 그분은 성도들의 죄를 깨닫게 했고 철저하게 회개하도록 외쳤으며 여기에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늘 강조했다. 오늘 한국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할 복음이 ‘회개와 성령의 역사’인데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는 소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분의 목회는 늘 하나님 사랑이 나라 사랑이고, 민족 사랑이라고 가르쳤다. 그 결과로 정동제일교회를 미련 없이 사임하고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던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손정도 목사의 목회가 당시 청소년들에게 큰 도전을 주었다고 한다. 구체적인 사례를 말해 달라.


강 장로=그분의 설교는 모든 세대가 공감하는 말씀이었다. 그분이 전남 진도 유배지에 머물 때 그곳의 주민뿐 아니라 일본 순사와 형사에게도 감동을 주어 회심하게 했다. 그분이 석방되고 서울에서 목회할 때 특히 청소년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동대문교회 담임 때 김상옥에게 하나님 사랑, 민족 사랑의 가슴을 불붙였다. 정동제일교회를 담임할 때는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학생들이 설교에 큰 감동을 받았고 특히 유관순에게 민족혼의 뜨거운 마음을 품게 했다. 김활란 역시 당시에 학생으로 손정도 목사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항간엔 ‘목사 손정도’보다 ‘독립운동가 손정도’로 더 알려져 있다.


이 장로=손정도 목사의 독립운동 역시 특별했다. 1912년 가츠라 음모 사건에 연루돼 심한 고문을 받았고 105인 사건으로 진도에 유배되기도 했다. 1919년 고종의 특사로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독립운동대표 33인에서 빠졌고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의 의장으로 섬기면서 후학 세우는 일을 위해 상해 인성학교 교장으로 그리고 김구, 여운형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조직하고 안창호의 권유로 흥사단에 가입하기도 했다. 이후 길림에서 안창호 선생과 함께 민족자강운동을 펼치면서 민족 이상촌 건설에 힘을 쏟았다.

-손정도 목사는 넉넉지 않은 환경에서도 성경 말씀에 따라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에도 힘쓴 것으로 아는데.

이 감독=그렇다. 손정도 목사에게는 노모(오신도)와 아내(박신일) 그리고 5명의 자녀가 있었다. 서울에서 목회할 때를 제외하고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빈궁한 삶이었다. 그런데도 안중근 의사의 부인과 그 자녀를 집에 직접 모시고 돌봤다. 김형직(숭실중학교 선배)의 아들 김성주(당시 15세)를 3년간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보살폈다. 훗날 김성주는 김일성으로 이름을 바꿔 북한 정권을 수립했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손정도 목사를 ‘생명의 은인’으로, 또 “손정도 목사님은 비록 나와 사상은 달랐지만 참으로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라고 밝히기도 했다.

-손정도 목사가 남긴 믿음의 업적은 한국교회의 유산이 아닌가 싶다. 또한 손정도 목사 가문에 아름다운 믿음의 유산을 남겼다.


손 장로=해석(海石) 손정도 목사는 그 호(號)처럼 바다의 돌과 같은 분이었다. 바다의 돌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우리 후손들에게 믿음의 큰 유산을 남기고 가셨다. 손정도 목사의 어머니 오신도 여사는 대한애국부인회 총재로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일에 평생을 헌신했다. 저의 부친인 손원일 장로는 해방이 되던 해 정부 수립과 국군 창설보다 먼저 해군을 창설하고 해군 제독으로, 해군 사령관으로 맥아더와 함께 인천상륙작전에서 해병대를 이끌고 참여해 서울을 수복했다. 육군이 아닌 해군이 ‘서울 수복 대국민 포고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후에 국방부 장관으로, 주독 대사로 일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제 부친은 서울 국립묘지에 안장 되고, 작은 아버님 손원태 장로는 미국에서 평생을 의사로 계시다 청소년 시절 김일성과 교제를 가진 관계로 지금은 평양 애국열사 능에 안장됐다. 남북 관계가 어수선한 이때 모든 관계가 빨리 회복돼 ‘복음 통일’이 속히 이뤄졌으면 좋겠다.

-앞으로 손 목사님을 더욱 알리기 위한 계획은.

이 장로=손정도목사기념사업회(https://sonjeongdo.modoo.at)는 이번 포럼을 통해 정리된 내용을 더 널리 전파하길 원한다. 나라사랑 청년음악회를 매년 열고 있다. 학술대회와 애국 통일 세미나, 손정도 오페라단 창단, 기념관 건립, 기념사업연합회 결성 등을 계획하고 있다. ‘애국지사’ 손정도 목사의 삶과 신앙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도 만들 계획이다(문의 02-745-1002).

-바쁘실 텐데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린다. 한국교회가 믿음의 선진을 만날 수 있었다. 손정도 목사의 하나님을 향한 헌신,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향한 열정이 오늘을 사는 크리스천들에게 전해졌으면 한다. 손정도 목사의 그 걸음이 우리의 걸음이 돼 ‘땅끝 복음’으로 힘차게 내딛는 한국교회였으면 좋겠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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