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두글자 발견 : 질문] 침묵하는 하나님, 고난 왜 주실까

픽사베이

‘질문’에는 힘이 있다. 인간은 질문하면서 성장하는 존재다. 질문은 외부에서 오기도 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데서 오기도 한다. 질문은 귀 기울이는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기도 한다. 배철현 서울대 교수는 질문을 통해 우리는 매 순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들어선다고 말한다.

“질문은 이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문지방이며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게 해주는 안내자이다. 우리는 매 순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들어선다. 질문은 지금껏 매달려온 신념이나 편견을 넘어 낯선 시간과 장소에서 마주하는 진실한 자신을 찾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문이다.”(배철현의 ‘신의 위대한 질문’중에서)

질문과 의문은 똑같이 물음표를 달고 있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의문은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문제나 사실을 뜻한다. 질문은 알고자 하는 바를 얻기 위한 물음이다. 질문은 답을 찾는 데 집중한다. 의문은 명료한 질문으로 변하지 않으면 의문으로 남는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인생에서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질문이 아닐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는 정신적·영적인 동물이다. ‘왜 사는가’란 근원적 질문은 내면을 깨운다. 매 순간 자신의 내면과 삶을 향해 진실한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던진 질문만 들여다보다 생을 마감하고 만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질문을 던져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도록 유도하신다. 성서 속에 담긴 하나님의 질문들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되묻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신 최초의 질문이 등장한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후 두려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 하신 질문이다. 이 간결한 질문은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이 묻고 싶은 것이다.

“네가 어디 있느냐”란 질문은 실존에 대한 물음이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깨닫고 서 있어야 하는 장소를 말한다. 사람이 자주 가고 거주하는 장소는 곧 그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네가 어디 있느냐”란 질문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와 같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바로 알고,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바로 아는 것이 신앙의 첫걸음이다. 그 자리는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의 두 번째 질문은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였다. 창세기 4장에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네 동생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는다. 이는 “인간은 누구인가”란 질문이다. 현대의 우리에게 이웃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이다. 이 시대의 아벨은 누구인가. 고정희 시인은 아벨을 찾은 하나님의 질타를 시를 통해 쏟아냈다.

“너의 안락한 처마 밑에서/ 함께 살기 원하던 우리들의 아벨/ 너의 따뜻한 난롯가에서/ 함께 몸을 비비던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풍성한 산해진미 잔칫상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던 우리들의 아벨… 어둠의 골짜기로 거슬러 오르던/ 너희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식탁과 아벨을 바꿨느냐/ 너희 침상과 아벨을 바꿨느냐/ 너희 교회당과 아벨을 바꿨느냐…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바람 부는 이 세상 어디서나/ 아벨의 울음은 잠들지 못하리”(고정희의 시 ‘이 시대의 아벨’ 중에서)

베첼리오 티치아노 작 ‘가인과 아벨’(1542~44년) 이탈리아 산타마리아 델라살루테 성당 소장.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인생의 위기와 고난은 뚜렷한 기준 없이 거의 모든 사람에게 무작위로 발생할 수 있어 부당해 보이기도 한다. 치명적인 병, 가족의 죽음, 사업 실패 등의 고난을 만날 때 인생의 위기감은 극에 달하고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억울한 심정의 포로가 된다.

특히 뜨거운 선교의 소명을 안고 선교지에 도착한 날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거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밟은 낯선 땅에서 자녀가 풍토병으로 목숨을 잃는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요’라는 원망을 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한다면 버림받은 자의 비참한 심정이 된다. 하나님과 단절된 것 같은 느낌 속에서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침묵. 어쩌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는 가장 힘든 고통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할 때 함께 아파하시기 때문이다. 고통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가 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으신다. 다만 신뢰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롬 8:28) 분임을 아는 것만으로 족하신다.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성경 욥기는 우리가 어떻게 고난에 대처할 것인가를 말해준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가를 생각하고,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는 그 행위는 다른 어떤 영적 훈련보다도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들을 수 있게 해준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 삶 속에서 자기 뜻을 완벽하게 이루신다. 하나님은 고난과 절망으로 깨어져 어두워진 마음의 틈새에 빛으로 스며드신다.

인생의 오답은 없다

삶은 시련과 축복의 연속이다.

고난을 겪을 때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고통이 있는 곳에 함께하신 하나님’이다. 그리하여 주님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고난 중에서도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이 사실을 믿을 때야 우리는 희망을 볼 수 있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참 모습이다.

인생에 정답이 없듯 오답도 없다. 삶을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답을 찾으려는 노력 그 자체가 정답이다. 그 여정을 계속할 때 인생은 풍요로워진다. 질문을 멈추면 의문이 찾아온다. 아리송하고 애매한 것을 억지스럽게 정당화하지 말고 자신의 감정을 명확히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좋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지금 나는 이것이 원망스럽다. 이것 때문에 상처를 입었고 슬프다”라고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자. 그러면 문제를 해결할 질문들을 떠올리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죽을 상황에 부닥쳤고, 목숨을 구할 방법을 단 한 시간 안에 찾아야만 한다면 한 시간 중 55분은 올바른 질문을 찾는 데 사용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올바른 질문을 찾고 나면 정답을 찾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우린 어떤 질문을 안고 살아가야 할까.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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