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유대열 (10) 드디어 중국 땅, 그날은 1994년 9월 6일

장소 확인 중에 마주친 국경 경비병 주민인 척 연기 하다 격술로 제압… 배고파 강물 마셔가며 압록강 건너

유대열 목사가 1994년 9월 중국으로 탈북한 뒤 현지에서 숨어 살 때의 모습. 오른쪽 사진은 유 목사가 중국 베이징 국제신우회에서 예배드릴 때 사용하던 영어 성경으로, 요한복음 3장 16절에 빨간색 줄이 쳐져 있다.

만포 시내는 캄캄했다. 시내를 통과한 뒤 저수지인지, 강인지 알 수 없는 넓은 물가에 섰다. 여기가 압록강이라면 곧 중국 땅에 들어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문제는 이곳이 정말 압록강인가 하는 것이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그렇게 강기슭을 따라 숨소리를 죽인 채 조심조심 가고 있는데, 몇 미터 앞에서 불쑥 사람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나지막하지만 위협적으로 “섯”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국경 경비병임을 알아차렸다. 경비병 두 명이 나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그들에게 “수고하십니다. 나 여기 만포 타이어공장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언젠가 만포에는 타이어공장이 유명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경비병은 “증명서 좀 봅시다”하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들은 경험이 없는 신병들이었던 것 같다. 보초를 설 때는 한 명이 증명서 검열을 하면 다른 한 명은 몇 발자국 떨어져 경계 태세를 늦추지 말아야 하는데 둘이 함께 다가왔다. 나는 상의 주머니에서 공민증을 꺼내 건네는 척하면서 오른손으론 증명서를 받으려던 병사의 기도를 타격했다. 동시에 발로는 옆에 있는 병사의 사타구니를 찼다.

10년 넘게 군대에서 격술(실전 무술)을 연마한 나였다. 내가 정확하게 그들을 타격하자 두 병사 모두 그 자리에 ‘헉’하고 쓰러졌다. 곧바로 경비병들의 총과 탄창을 분리해 강물에 버리고는 신속히 자리를 떴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달리자 산이 보였다. 산에 숨어 주변을 확인하고 압록강과 중국 땅의 방향을 확인해야 했다.

나는 산기슭으로 난 길을 따라 다시 1시간가량을 안전한 곳이라 생각되는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산 정상에 올라 얼마 지나자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지난밤 일어난 사건으로 경비대에는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심한 갈증과 배고픔을 참아가며 산 정상에 머물러 있었다. 산 밑으로 비교적 큰 강이 보였고 건너편 강변에 집 한 채가 보였다. 그런데 거리가 멀어 그 집이 중국 집인지, 북한 집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하루를 꼬박 새우고 다음 날 정오쯤 됐을 때였다. 강 건너편 길을 따라 트랙터 한 대가 멀리서 오고 있었다. 그 트랙터는 분명 북한 트랙터가 아니었다. 북한 농장들에서 사용하는 트랙터보다 작았다. 달구지 같은데 앞에 한 사람이 앉아 운전하는 소형 트랙터였다. 중국에나 있는 것이었다.

산 아래 흐르는 강은 압록강이고 건너편 땅은 중국 땅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밤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전에 한 가지 더 확인할 것이 있었다. 여기는 국경지대라 경비가 삼엄하다. 국경 경비대원들의 초소와 잠복 위치를 확인해야 했다. 자세히 보니 도로에서 좀 떨어진 곳들에 잠복초소가 100m 거리마다 있었다.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산을 살금살금 내려갔다. 산에서 내려간 뒤에는 납작 엎드린 상태에서 손과 발만을 사용해 기어갔다. 국경 경비대 잠복초소 사이를 2시간 정도 기어서 강까지 갔다. 드디어 압록강에 이르렀다. 수영으로 건너기 시작했다. 강 가운데에 이르자 유속이 매우 빨라졌다. 경비병에 들킬까 헤엄도 못 치고 그저 떠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꼬박 3일을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상태였기에 강물을 마셔가며 마침내 압록강을 건넜다. 강변에 이르러 두 발로 섰다. 중국 땅이었다. 나도 탈북자가 된 것이다. 1994년 9월 6일이었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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