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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 기자 성기철의 수다] 개기면서 대충 살라고?


속도경쟁으로 스트레스 가중… 서두르지 말라지만 비현실적
마음의속도 늦춰야 여유 생겨… 세상욕심 줄이는 게 관건


대학병원에서 처음 종합건강검진 받았을 때 얘기다. 담당 교수가 검진 결과를 설명하며 내게 스트레스가 굉장히 많다고 했다. 스트레스 관련 자필 설문지에 부정적인 답변이 거의 없었다고 항변(?)해 봤지만 종합판단 결과 많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재미있는 건 그가 가르쳐준 스트레스 저감법. 대뜸 직장에서 잘릴 가능성이 있느냐고 묻기에 “현재로선 없다”고 대답했더니 이렇게 조언했다.

“그렇다면 회사에서 업무 능력을 100% 발휘하지 않도록 하세요. 또 가용 시간을 100% 사용하지 않도록 하세요. 능력과 시간을 80%나 90%만 회사에 기여한다는 느낌을 갖고 천천히 일해보세요. 출근할 때 가끔 30분 정도 지각하더라도 조바심 내지 않도록 하세요. 그래도 해고당하진 않겠지요? 친구들과의 약속도 30분 정도 늦는다고 우정이 깨지지 않을 테니 너무 서두르지 마시고요.”

황당하게 들렸다. 40대 초반, 일 많기로 소문난 정치부 보조데스크로 있을 때였으니 현실성이 전혀 없는 조언이었다. 신문 제작 마감시간이 임박하면 늦지 않으려고 피를 말리는데 능력과 시간을 100% 사용하지 말라니…. 이 얘기를 전해들은 부장한테서 돌아온 답은 시큰둥하면서도 싸늘했다. “개기면서 대충대충 일하라는 거네. 80%를 하든 70%를 하든 난 몰라. 당신 맘대로 하셔.” 돌이켜보면 그 교수의 조언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됐던 것 같다.

신문기자만 바쁘게 사는 건 아니다. 소방대원, 택배 직원, 콜센터 근무자, 응급실 의료진 등은 기자보다 더 급하게 움직이며 산다. 아니 굳이 직업을 구분할 것도 없다. 대한민국 직장인이라면 너나할 것 없이 출근전쟁 치르느라 아침마다 종종걸음이다. 인류 역사가 속도경쟁, 속도혁신을 통해 발전해왔기에 ‘빨리빨리’ 문화는 불가피한 건지도 모른다.

21세기 현대문명은 초스피드 경쟁을 부추긴다. 국가 간 초음속 무기 개발 경쟁, 이동통신사들의 5G 데이터 전송 속도 경쟁, 차세대 모바일 D램 개발 경쟁…. 기계들의 속도 경쟁에 사람들이 온통 전염돼 있다. 기계에 얹혀 브레이크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형국이다. 몸이 피곤할 수밖에 없다. 몸보다 더 피곤한 건 마음이다. 몸의 속도를 유지하거나 높이고자 마음은 한걸음 앞서 내달리기 때문이다. 스트레스가 엄습하는 이유다.

스트레스 없이 살라고, 마음 편히 살라고, 언젠가부터 ‘느림의 미학’을 논하는 사람이 많다. 밀란 쿤데라는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지만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느림’ 민음사)고 했으며 알랭 드 보통은 “사람이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여행의 기술’ 청미래)라고 강조했다. 대만 사업가 임창생은 “예나 지금이나 지구는 늘 같은 속도로 돌고 있는데 우리는 왜 자꾸만 바쁘게 살아가려 하는가. 이제 조금만 걸음을 늦추자”(‘마음껏 행복하라’ 21세기북스)고 제안했다.

하지만 속도가 곧 경쟁력이며 성공의 지름길인 세상에 살면서 대놓고 ‘천천히’를 외칠 수는 없다. 몸의 속도 줄이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지각하더라도 조바심 내지 말라고? 가용시간을 다 사용하지 말라고? 보통의 직장인에겐 결코 적용될 수 없는 무책임한 소리다. 이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하루 일과를 조금 일찍 시작하는 것 아닐까 싶다.

3년여 전부터 나는 일찍 출근하는 걸 생활화해 자그마한 행복감에 젖어 있다. 러시아워를 피해 오전 7시30분쯤 회사에 도착하면 모든 게 조용해서 나만의 여유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쥘 르나르가 했던 아침기도를 따라 해본다. “눈이 보인다. 귀가 즐겁다. 몸이 움직인다. 기분도 괜찮다. 고맙다. 인생은 참 아름답다.” 연결해서 회개와 은총기원 기도를 잠시 한 뒤 조간신문 뒤적이며 느긋하게 마시는 무설탕 아메리카노 커피가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다. 이어 유튜브로 좋아하는 음악 틀어놓고 밀린 독서라도 조금씩 하면 나 자신을 살찌운다는 생각에 묘한 희열을 느낀다.

그 때문일까. 급한 내 성격이 요즘 조금 느긋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엘리베이터에서 닫힘 버튼 누르지 않는 여유, 횡단보도 파란불에 깜빡이 켜지면 서둘러 건너는 대신 다음 신호 기다리는 여유, 전화벨 울릴 때 바로 받지 않고 두세 번 울린 뒤 받는 여유가 생긴 것 같다. 식사 속도, 말하는 속도도 늦춰보고자 노력하지만 잘 되진 않는다.

하루를 일찍 시작한다고 마냥 여유가 생기는 건 아닐 게다. 자신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지고 조급증이 부활한다. 제대로 된 해결책은 역시 마음의 속도를 줄이는 것 아닐까 싶다. 미국 심리치료사 에크낫 이스워런은 ‘마음의 속도를 늦추어라’(바움)에서 “빠른 마음은 병들어 있다, 느린 마음은 건강하다, 고요한 마음은 거룩하다”고 전한다. 그는 화, 두려움, 격정 같은 부정적인 것들은 대개 빠른 마음인 반면 사랑, 인내, 온유, 동정, 이해 등 긍정적인 것들은 느린 마음이라고 규정했다.

이스워런식 이분법을 적용하면 욕심은 빠른 마음이고 비움, 혹은 내려놓음은 느린 마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구든 비우고 내려놓아야 느린 마음이 생겨 화, 두려움 따위를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아 해본 생각이다. 문제는 권세와 돈, 명예 같은 세상 욕심 내려놓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난들 쉬울 리 없다. 하지만 조금씩이라도 내려놓는 연습을 시작은 해야겠다. 마음의 속도, 조금씩이라도 늦추는 노력을 시작은 해야겠다.


성기철 경영전략실장 겸 논설위원 kcs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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