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문장의 기준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 그 자체로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으나 문장이 하나뿐인 글이 아니라면 어떤 문장이든 다른 문장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의미를 오롯이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문장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지만 그런 사실이 반드시 좋은 글이냐 아니냐를 가늠하는 기준일 수는 없다. 이와 관련해서 베트남의 소설가 바오 닌을 예로 들고 싶다. 그이의 소설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문체가 너무나 독특해서 설령 작가의 이름을 가린대도 나는 그이의 소설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을 듯하다.

바오 닌 소설문체의 특징은 한마디로 과잉이다. 과잉이긴 하지만 불필요한 수식이 넘쳐난다고 할 수는 없다. 형용사와 부사가 정도 이상으로 남용된 글은 아니다. 그러나 감정을 드러내는 단어들이 지루할 만큼 많고 감탄사와 감탄형 종결어미 등을 사용한 영탄법에 의존한 문장이 흔하다. 우리는 보통 이런 문장을 신파조의 문장이라 한다. 인물이 느끼는 고통, 슬픔, 분노, 절망 등의 감정과 인물이 처한 상황이 과장되어 전체적으로 절제가 부족하고 과잉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이런 신파조 문장은 독자의 몰입을 방해하기 마련이다. 독자에게 이렇게 느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같아 반발심이 생겨서이기도 하고 점점 그 상태에 무감각해져 문장을 눈으로는 읽고 있되 무슨 뜻인지 파악할 수 없게 되어서이기도 하다. 신파조 문장에도 장점은 있다. 처음 그런 문장을 만나게 되면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멱살을 잡혀 끌려가듯 감정의 수렁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순식간에 감정이 고양되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단번에 독자의 이목을 사로잡고 감정이입이 손쉽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그런 상태를 끝까지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바오 닌의 소설을 읽으면서 바로 그런 경험을 했다. 문장마다 감정이 흘러넘쳤고 상황마다 극적이어서 긴장이 됐다. 그러나 몇 쪽 지나지 않아 지루해졌다. 인물이 뭘 느끼는지는 알겠으나 감정의 얕음과 깊음에 따른 섬세함이 없어 다양한 감정들이 단 하나의 감정인 것처럼 단조롭게 다가왔다. 오해, 이별, 죽음, 전쟁과 같은 상황도 처음처럼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 않게 됐다. 아마도 감정이 과잉된 감상적인 글에 질색하는 독자라면 그쯤 책을 덮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하마터면 그럴 뻔했다. 바오 닌의 문장은 그냥 나쁜 문장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나쁜 문장 같았다. 내가 아는 모든 나쁜 문장의 요소로 빈틈없이 무장한 나쁜 문장 중의 왕처럼 여겨졌다. 만약 내가 정말로 거기에서 독서를 멈췄다면 나는 귀중한 깨달음 하나를 얻게 되는 기회를 놓쳤을 테다.

소설을 다 읽은 뒤 조용히 책을 덮었다. 그러나 내 안에서 그 소설은 활짝 펼쳐진 채로 남았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런 경험은 뜻밖이어서 내가 느낀 것들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그이의 문장은 나쁜 문장의 표본처럼 과잉돼 있었고 끔찍할 만큼 지루했다. 머리칼이 쭈뼛 서고 팔뚝에 오스스 소름이 돋을 만큼 감상적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책을 덮는 순간 느껴본 적 없는 깊은 슬픔에 빠져야 했다. 나쁜 문장이 대부분인 그이의 글이 어째서 이토록 섬세하고 아름답고 눈부시단 말인가. 과잉으로 여겨졌던 문장 하나하나가 극도로 절제된 문장인 것처럼 새롭게 다가왔다. 문장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순하고도 비범한 진실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감각적이고 세련되고 우아하게 언어를 조탁하는 대신 투박하고 거친 그대로의 모습을 독자에게 보여줘 독자 스스로 그걸 어루만지고 다듬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끈기와 인내심을 봤다. 그게 바로 작가의 용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가장 격정적인 소설은 작가가 가장 냉철한 순간에 쓴 것이며, 가장 차분하고 냉정한 소설은 작가가 열광에 사로잡혔을 때 쓴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바오 닌의 소설을 읽고 묘한 위로를 받는다. 문장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지만 한 편의 좋은 글은 문장의 관계 속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이 삶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려니 싶어서다. 우리 삶이 한 권의 책이라면 좋은 시절도 나쁜 시절도 있겠지만 결국 좋은 삶이란 좋은 시절로만 이뤄진 게 아니라 그 모든 순간들이 어우러져 숨겨졌던 의미가 드러나는 삶일 것이다. 삶은 장점과 성공과 도약으로만 완전해지는 게 아니라 결함과 실패와 추락을 껴안음으로써 완전해진다는 뜻일 테니까.


손홍규 소설가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