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

“돌고 돌아 ‘박스피’네요. 허탈합니다.” 직장인 최모(37)씨는 최근 눈물을 머금고 보유 주식을 모두 팔았다. 손에 남은 건 ‘-500만원’이란 투자 성적표였다. 코스피지수가 2400선을 넘나들던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투자 수익은 3000만원에 달했다. 그런데 그해 연말 코스피가 2000선으로 고꾸라졌다. ‘멘탈’을 부여잡으며 반등을 기다렸지만, 희망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코스피는 이달 들어 1900선까지 주저앉으며 3년 전 수준으로 돌아가 버렸다. 최씨는 “더 이상 ‘존버’(끝까지 버틴다는 뜻의 속어)할 기운도, 돈도 없다”고 말했다. “요새 금이 뜬다더라고요. 이제 주식은 쳐다도 안 볼 겁니다.”

최근 미국과 중국(G2)의 환율전쟁으로 국내 증시가 폭락하면서 최씨 같은 개미(개인투자자)들이 ‘패닉’에 빠졌다. 일본이 경제보복, 한국 기업들의 실적 악화 등이 이어지면서 국내 증시는 최근 한 달 새 7% 넘게 빠졌다. 한국 주식시장보다 더 크게 내린 시장은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는 홍콩(-10%) 아르헨티나(-26%) 정도다. 저금리 시대에서 조금이라도 높은 수익률을 거두려고 파생결합증권(DLS) 상품에 돈을 넣은 투자자들도 최근 선진국 국채 금리 하락으로 ‘원금 증발’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투자 손실에 울상 짓는 건 비단 ‘개미’만이 아니다. 경기 침체 우려로 투자 자산이 요동치면서 이른바 ‘큰손’의 투자 실패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다. ‘투자 현인’은 물론 ‘역발상’ 투자의 대가도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에 엄청난 손실을 입기도 한다.

채권왕과 현인의 실수

“채권왕의 시대는 끝났을지도 모른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17일(현지시간) 채권 펀드매니저인 마이클 하젠스탑 프랭클린템플턴 부사장의 투자 실패를 알리며 이렇게 보도했다. ‘채권왕’은 글로벌 채권시장의 ‘큰손’으로 통하는 하젠스탑을 일컫는다. 그가 운용하는 펀드는 아르헨티나 대통령 예비선거 결과가 나온 12일(현지시간) 18억 달러(약 2조2000억원)의 손실을 기록했다. 극단적 좌파 성향 후보인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전 총리가 예비선거 득표율 1위를 차지하면서 아르헨티나 금융시장이 발칵 뒤집힌 탓이다.


아르헨티나 증시는 월요일(12일)에 장이 열리자 48%(미국 달러화 기준)나 폭락했다. 달러 대비 아르헨티나 페소화 환율도 30% 상승(통화가치 하락)했다. 이에 따라 아르헨티나 투자 비중이 10% 이상이었던 하젠스탑의 신흥국 펀드 수익률도 급락을 피하지 못했다. FT는 “아르헨티나 사태로 하젠스탑보다 더 망가진 휴일을 보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오마하의 현인’이라 불리는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도 자신의 ‘오판(誤判)’으로 쓴맛을 봤다. 버크셔해서웨이는 ‘하인즈 토마토케첩’으로 유명한 미국 식품기업 크래프트하인즈의 지분을 26.7% 갖고 있다. 그런데 크래프트하인즈 주가는 올해에만 34% 떨어졌다. 버크셔해서웨이가 입은 손실은 현재까지 53억 달러(약 6조4000억원)에 이른다. 버핏 회장은 지난 2월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열린 주주들과의 만남에서 “2015년 크래프트하인즈 투자 당시 브랜드 가치를 낙관했고 결국 지나치게 많은 돈을 썼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버핏 회장의 개인 재산은 880억 달러(약 100조원)에 달한다. 크래프트하인즈 주가 폭락에도 여전히 재산은 많다. 하지만 그는 “식품 시장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미국 소비자들의 관심이 친환경·건강 위주로 바뀌면서 신생 기업들은 유기농 식자재 등을 이용한 신제품 개발에 적극 나섰다. 식물성 고기 제조 업체인 비욘드미트는 지난 5월 나스닥 시장에 상장한 직후 주가가 25달러에서 140달러로 치솟기도 했다.

‘투자 큰손’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도 비트코인 투자로 꽤 큰 손해를 봤다. 손 회장은 2017년 소프트뱅크가 인수한 자산운용사 포트리스의 피터 브리거 회장 추천으로 비트코인에 개인 돈을 넣었다. 당시 비트코인 가격은 2만 달러(약 2400만원)였다. 손 회장은 지난해 초 비트코인 시세가 급락하자 모두 ‘손절매’했고, 1억3000만 달러(약 1480억원)의 손실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가장 날카롭고 돈 많은 투자자도 자산 광풍에 빠져들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꼬집었다.

믿을 건 안전자산?

글로벌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투자자들은 안전자산으로 달려가고 있다. 큰손들도 실패를 피하기 어려울 만큼 자산 가격이 요동치면서 돈을 지키려는 심리가 더욱 커진 탓이다. 최근 미국 장기 국채(10년물) 금리보다 단기 국채(2년물) 금리가 더 높은 기현상이 벌어지면서 불황 경고음은 고조되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금리 인하로 글로벌 유동성은 점점 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채권과 금, 일본 엔화 등의 몸값은 연일 치솟는다. 주식 등 위험자산이 불안할수록 안전자산 가치는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에서다. 실제 금값이 고점을 찍었던 시기는 세계 경제가 혼란에 빠졌던 2008년 금융위기 이후였다. 이달 들어 글로벌 상장지수펀드(ETF)의 주간 수익률 ‘톱 10’을 금과 천연가스, 은 등 원자재 ETF와 미국 국채 20년물 ETF가 싹쓸이했다. 금 ETF는 1년 새 100% 넘게 오르며 가장 높은 수익률을 올렸다.

큰손들도 분산 투자에 돌입했다. 버핏 회장의 버크셔해서웨이는 지난 3일(현지시간) 발표한 실적 보고서에서 역대 최고 수준인 1220억 달러(146조원)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공개했다. 주식을 팔고 ‘현금 쌓기’에 나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자금 조달 창구를 다양화하기 위해 최대 1000억엔(약 1조1000억원) 규모의 엔화 기반 채권도 발행키로 했다. 버크셔해서웨이가 달러 대신 엔화 채권을 발행하기는 처음이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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