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미국 사역 길 다시 열어주세요”… LA서 부흥회

홍예숙 사모의 성경적 신유의 은혜 <8>

오창호 부산 대망교회 목사가 2014년 2월 강원도 철원 성소기도원에서 열린 대망교회 원더풀가족캠프에서 두 손 벌려 찬양하고 있다. 대망교회 제공

1984년 미국에서 돌아와 두 번째 금식을 끝내고 보호식을 하고 있을 때 일이다. 한 신사분이 대구 주암산기도원에 오셨다. 기도원에는 하루에도 여러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었지만 유독 그분이 눈에 띄었다.

소망고아원을 운영하는 장로님이었다. 원장님과 대화하며 고아 중 몇 아이가 속을 썩여 하나님께 고아원을 계속 운영해야 할지 말지를 기도하러 왔다고 했다.

“장로님, 장로님께서 안 돌보면 그 아이들은 죽습니다. 하나님이 장로님을 버려도 좋습니까. 하나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장로님에게 베푸신 그 사랑으로 품으십시오. 장로님도 하나님께 애 많이 먹였잖아요.”

금식 끝이라 영권이 있었는지 그 한마디에 영적 KO승이었다. 장로님은 사업이 아니라 사명감으로 고아를 품기로 각오하셨다. 그때부터 나도 고아를 생각하게 됐다.

소망고아원에 갔는데, 미국 사역과는 확실히 달랐다. 내가 희생해야 했다. 말도, 행동도 조심해야 했다. 조심할 것투성이였다. 축복해도 반항이 왔다. 훈계해도 “너나 잘해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러나 내게는 예수님의 권위가 있었다. 나이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주셨다.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들을 사랑으로 품자 점점 나의 말에 귀 기울여 주었다. 서로 끌어안았다. 그들의 아픔과 슬픔과 즐거움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공감하는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고아원 사역에 전력을 다했다. 미국에서 사역하며 강사비 받은 것이 좀 있었다. 쓸 줄도 몰랐고 감당할 수도 없는 달러였다. “하나님, 이 달러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주시려면 한국 돈으로 주시지….” 골치 아픈 달러를 없앨 기회가 왔다.

“원장님 달러 아세요?” 빙그레 웃으셨다. 그때부터 고아원을 지원했다. 대학에 가는 아이들도 생겨났다. 나보다 나이 많은 아이들도 있었다. 참 감사했다. 그와 함께 아이들에게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쳤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축복, 세상에서 누릴 복을 가르쳤다. 그러는 동안 내 몸과 마음도 회복됐다. 대구 소망고아원 원장님은 다시 나를 미국에 가게 하는 통로가 됐다. 하나님이 다시 쓰시기 위해 만나게 하신 분이었다.

장로님에게 그동안 진행했던 미국 사역을 간증했다.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장로님의 처제가 미국인과 결혼해 미국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내 얘기도 들은 것 같다고 했다. “미국에 다시 가지 않겠습니까.” 내게 조심스레 물으셨다. “가고 싶죠. 하나님께서 뜻이 있으시면 홍해를 가르심같이 다시 길을 열어 주실 줄 믿습니다.”

미국은 내 힘으로는 다시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귀국 후 2년여의 시간이 흐른 당시, 미국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내가 없었다. 한국 사람인 데다 어린 나이에 주의 일을 했기에 한때 기적의 사람으로만 회상될 뿐이었다. 다시 찾지도 않았다.

미국에서의 사역이 너무 그리웠다. 입에서 기도가 터져 나왔다. “하나님, 저 이제 생각까지도 아버지께 맡기오니 미국 사역의 길을 다시 열어주세요. 한 번만 더 열어주세요. 아버지를 위해 일할게요. 교만하지 않을게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장로님이 입을 열었다. “갑시다. 제가 도울게요.”

한 달이 지난 뒤 기도원에서 다시 소망고아원 장로님을 만났다. 장로님을 보자마자 ‘야! 미국 문이 열렸다’는 확신이 들었다. “장로님, 미국에 가게 된 거죠?” “어떻게 알았지요?” “하나님께서 장로님을 뵙는 순간 알게 해주셨어요.”

그때부터 미국 집회가 다시 잡혔다. 모든 서류는 장로님이 준비해 주셨다. 처음 갈 때와 달리 한국인과 동행했기 때문에 절차가 까다로웠다. 그러나 처음 간 행적이 있었기에 잘 해결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간 미국 길은 첫 번째로 간 미국 길과 너무나 달랐다. 처음에 길을 여실 때는 미국 현지교회 부흥회였는데 금식 이후 다시 여신 미국 사역은 주로 한인교회 집회였다.

집회는 LA에 있는 교회에서 열렸다. 미국교회당을 빌려서 예배드리는 한인교회였다. 한국인이 많이 모여 있었다. 부흥회 첫날은 너무너무 답답했다. 다들 생계유지를 위한 피곤함에 찌들어 있었다. 서글픈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찌들어 있던 육신과 영혼에 생기가 들어가고 기쁨이 샘솟았다. 몸이 낫고 부르짖기 시작했다. 찬양하고 박수를 쳤다.

부흥회 둘째 날이 되자 미국인도 조금씩 오기 시작했다. 집회는 계속됐다. 미국인이 많아지자 한국인이 통역을 했다. 그제야 좀 신이 났다. 미국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인들과 달랐다. 무엇보다 찬양 부르는 자세가 달랐다. 한국인은 타인의 시선을 보며 조심스러워하는 반면 미국인은 자유분방했다. 성령님이 임하시자 병자가 나았다. 한국인, 미국인 다 하나가 돼 부르짖었다. 첫 번째 때 나를 쓰셨던 그 하나님께서 다시 나를 사용해 주셨다.

홍예숙 사모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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