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강제징용 판결이 국제법 위배라는 일본 주장은 억지
한일 청구권 협정 불구하고 불법적 식민지배에 따른 개인 배상청구권은 살아 있어
일본의 사죄, 피해자 중심 해결 원칙 하에 당당하게 대응해야


한·일 분쟁 해결의 돌파구를 찾을까 기대를 모았던 21일 양국 외교장관회담이 입장 차만 확인한 채 끝났다. 외교적 협상을 계속하기로 했지만 양국의 인식 차가 커 갈등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번 사태는 과거사 문제에서 촉발됐다. 일본은 한국의 전략물자 관리 허술을 수출 규제의 이유로 내세우지만 속셈은 따로 있다. 자신들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온 한국 경제에 제동을 거는 노림수라는 주장도, 전쟁 가능한 국가를 위한 개헌 분위기를 띄우려고 한국 때리기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런 가능성도 있겠지만 경제보복을 단행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불만일 게다. 아베 신조 총리나 고노 다로 외무상 등이 세계무역기구(WTO) 위반을 자인하는 셈인데도 수출 규제와 관련해 ‘강제징용 문제’를 언급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 대법원이 지난해 10월 일본 기업에 대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확정하자 일본 정부가 반발했고 우리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경제보복 카드를 꺼내들었다. 아베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는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일단락됐다고 주장한다. 일본 기업들이 배상에 응하지 못하도록 막은 채 우리 정부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아베 정부는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 포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중략)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명시된 협정문 제2조 1항을 근거로 들고 있다. 하지만 아베 정부의 주장은 일본이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 모호하게 처리한 협정문을 자국에 유리하도록 확대 해석한 일방적인 해석일 뿐이다.

우리 정부의 해석은 다르다. 노무현정부 때인 2005년 구성된 민관공동위원회는 활동을 마친 후 한일 청구권의 기본 성격을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 차원이 아니라 해방 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규정했다. 또 “우리 정부가 일본에 다시 법적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신의칙상 곤란하지만 피해자 개개인들이 (중략) 일본에 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국가의 배·보상 청구권이나 개인의 보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으로 소멸됐지만 개인의 배상청구권은 유효하다고 본 것이다. 일본 정부도 한동안 개인청구권을 인정했다. 1991년 8월 당시 야나이 순지 외무성 조약국장은 “한일 청구권협정은 한·일 양국이 가지는 외교보호권을 서로 포기한 것”이라며 “개인청구권 자체를 국내법적 의미로 소멸시킨 것이 아니다”고 했다. 고노 외무상도 지난해 11월 일본 의회 답변에서 개인청구권이 살아있다고 답변한 바 있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민족주의에 경도된 무리한 판결이 아니라 이런 법리에 근거한 판결이다. 대법원 판결이 국제법에 위배된다는 아베 정부의 주장은 억지다.

일본 정부는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 공식적으로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죄했다. 그러나 아베 정권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부인하고 있다. 아베 정부가 이런 인식이 바뀔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래서 앞날이 어둡다.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 심사 우대 국가)에서 배제한 이후 반도체 일부 부품에 대한 수출을 두 차례 허용했지만 경제보복을 중단한 것은 아니다. 일본의 보복과 한국의 맞대응이 이어지면 양국 모두 피해가 늘 수밖에 없다. 양국 정부가 냉정을 되찾고 사태 해결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서둘러 봉합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원칙을 세우고 당당하게 대응해야 한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불법 행위이며 이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해야 한다는 것, 강제징용자·위안부 등 피해자를 중심에 놓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게 원칙이 돼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 사법부의 결정을 존중하면서 양국 정부와 피해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 국제사법재판소로 강제징용 문제를 가져가야 한다는 주장(이원덕 국민대 교수)이 있다. 국제통상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아베 정부와 외교적 합의를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만큼 사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관리하면서 양국 시민사회의 연대를 통한 해결을 제안한다. 일본의 양심세력과 연대해 아베 정부를 압박하고, 우리 수혜 기업과 일본 기업의 성의있는 조치를 이끌어냄으로써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공감을 얻는 방식이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제3국의 중재 등 외교적 해결 방안도 다각도로 모색해야 한다. 그렇다고 또 다른 갈등의 불씨가 될 어정쩡한 합의를 해서는 안 된다. 한·일 갈등의 장기화 가능성을 열어놓고 긴 호흡으로 대응해야 한다. 사태가 장기화되면 일본도 힘들다. 이번 사태가 부품·소재 산업의 대일 의존도를 낮추고 우리 경제 시스템을 개선하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원칙을 지키면서 진중하게 해법을 찾아가는 뚝심이 필요할 때다.

라동철 논설위원 rdch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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