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 비가 대지를 적시던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추모비 앞에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브란트 총리는 두 눈을 감고 손을 마주잡은 채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 온몸으로 사죄했다. 피해자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죄를 얘기할 때 거론되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당시 서독에서는 ‘과도한 굴욕 외교’라는 비판이 일었지만 브란트의 사죄는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인 독일에 대한 국제사회의 냉담한 시선을 녹이는 촉매가 됐다. 최근 폴란드와 그리스가 전후 배상 문제를 다시 거론해 파열음을 내고 있지만 독일은 과거 잘못에 대해 일관되게 사죄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취해 왔다. 이는 독일이 나치의 원죄에서 벗어나 1990년 통일을 달성하고 유럽연합(EU)의 맹주국가로 발돋움한 배경이다.

지난 27일 여러 신문에 브란트의 사과를 연상케 하는 사진 한 장이 실렸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54)씨가 지난 23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하는 장면이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재헌씨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전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에게 사살된 윤상원 열사,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82년 체포된 후 단식투쟁 끝에 옥사한 박관현 열사 등의 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재헌씨는 앞서 방명록에 “진심으로 희생자와 유족분들께 사죄드리며 광주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라고 적었다.

5·18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한 신군부의 핵심 실세였던 노 전 대통령은 내란죄 등의 혐의로 전두환 전 대통령 등과 함께 법적 단죄를 받았지만 그간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 ‘5·18의 진범은 유언비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재헌씨와 동행한 인사는 “노 전 대통령이 평소 5·18민주묘지에 참배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얘기했지만 병세가 악화돼 아들이 대신 온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노 전 대통령이 삶의 끝자락에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한 셈이다. 노 전 대통령이 직접 사죄하고 5·18 진상 규명에도 협조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재헌씨의 참배는 역사적 화해의 첫 단추를 뀄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재헌씨는 ‘사죄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다’고 말했다는데, 노 전 대통령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다.

라동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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