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시사 > 전체기사

[역경의 열매] 유대열 (19) 사선을 넘어 생명의 땅 한국 도착

미국행 어려워져 일정 촉박, 체류기한 넘기면 북으로 송환될 위기…언론 비공개 약속 받고 한국행 결정

유대열 목사가 홍콩의 수용소 직원에게서 받은 결혼식 사진이다. 형제처럼 친하게 지낸 그는 자유의 땅으로 가면 꼭 놀러오라며 이 사진을 건넸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중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 망명을 결심하고 홍콩으로 왔지만, 송환될 위기에 처하자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 이들이 많았다. 탈북자들도 홍콩 수용소에 2주 동안만 체류할 수 있었기에 나도 그들과 같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나처럼 미국행을 요구하는 경우 문제 해결이 쉽지 않아 일정이 더 촉박했다. 시일이 다가오자 홍콩법원에서는 나를 중국으로 송환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럼 북한으로 송환될 것이 뻔했다. 희망이 사라지자 최후의 방법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송환을 거부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던 그들처럼 말이다. 나는 밤새 ‘하나님, 제게 이 길밖에 없다면 기꺼이 가게 하소서. 다시 북한 악한들의 손에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붙드소서. 저를 담대하게 하소서’라고 부르짖으며 직접 만든 자살용 칼을 손에 쥔 채 무릎을 꿇고 매일 기도했다. 밤새 기도하며 새벽이 밝아오던 어느 날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몇 번 살려주었더냐. 내가 수용소라고 어찌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음성이었다. 칼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를 사랑하는 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수용소에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다’는 믿음이 내게 생겼다.

그동안 자살을 시도하는 수감자를 몇 번 도운 일로 수용소 직원들과도 친해졌다. 틈틈이 탈북자들이 들어오면 그들의 통역과 서류 작성을 돕기도 해 호형호제하는 사이까지 됐다. 비록 수감자의 몸이라 남루한 행색이었지만 그들은 날 존중해줬고 자유의 땅으로 갈 수 있을 것이란 위로의 말도 해줬다. 미국행이 결정될 때까지 나의 홍콩 체류를 연기해달라는 탄원서도 법원에 제출해줬다. 당시를 생각하면 성경의 요셉 이야기가 생각난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수용소 안에서도 함께하신다는 걸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수용소에 있을 때, 홍콩의 한국영사관 직원이 여러 차례 날 찾아와 면담했다. 부모님의 안위 때문에 한국행을 선택할 수 없다는 걸 안 그는 원하지 않는다면 한국에 가도 언론에 공개되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듬해 1월 말쯤 내 한국행이 결정됐다. 비행기에 탑승하자 만감이 교차했다. 탈북자로 숨어 지낸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날 살려주신 하나님, 그 강하신 두 팔로 안으시고 보호하시며 생명의 땅으로 넘겨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1997년 봄 한국에 도착했다. 서울시내를 통과하며 놀란 건 63빌딩도, 수많은 차도 아니었다. 건물 높이 걸린 빨간색 십자가들이었다. 북한에는 없고 남한에만 가득한 것이 바로 십자가였다.

몇 달간 조사받은 뒤 9월 말 주민등록증을 받고 정식으로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됐다. 당시에는 탈북자에 관심 있는 교회와 탈북자를 연결해 정착을 돕는 제도가 있었다. 나는 송파제일교회와 인연을 맺었고 박병식 목사님과 귀한 인연도 그때 시작됐다. 98년 11월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교회학교 중등부 교사로도 봉사했다.

사선을 넘어 이 땅에 들어온 탈북자들의 절대다수가 현지 선교사들과 교회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땅에 와서도 사회에 정착하고 자립하는 데 교회의 도움과 역할이 매우 크다. ‘하나님의 때가 돼 북한에 복음을 전하고 무너진 교회들을 다시 세울 때, 혈혈단신의 나를 위해 고향이 돼주고 친정집이 돼준 교회와 같은 교회들을 세우리라’하는 마음을 다져본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