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룽징 한인 기독공동체가 일으킨 만세운동, 대륙을 깨우다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3부> (1) ‘간도 대통령’ 김약연 목사와 3·13 룽징 만세 시위

국민일보는 올해 1월 1일부터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연중기획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1부는 3·1운동 당시 종교인 피검자 가운데 51%가 기독인이었다는 점을 발굴하는 등 만세운동 때 한국교회의 역할을 총론으로 조명했습니다. 2부에선 종교부 기자들이 전국 20여곳을 찾아 지역 교회와 교계 인물들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발굴했습니다. 3부에선 3·1운동이 세계 각국에 전파한 자유 정의 독립의 정신을 해외 취재를 통해 전달합니다.

1944년 4월 중국 지린성 룽징시 인근 명동촌에서 열린 김약연목사기념비(파란색 표기) 제막식. 김 목사가 담임한 명동교회 성도들이 함께한 사진으로 명동학교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지난달 3일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조선족자치주에 있는 룽징(龍井)의 시인 윤동주 생가 입구. 명동촌 주민들이 세운 110년 역사의 명동교회 바로 옆에 이상한 모양의 비석이 눈에 띄었다. 기와지붕 아래 놓인 비석의 주춧돌은 펼쳐진 책자 모양이었다. 보통 비석을 떠받드는 거북이가 놓여야 하는 자리인데 성경책 모양이었다. 군데군데 깨지고 파인 비석 정면에는 ‘김약연목사기념비’라고 한문으로 새겨져 있었다. 명동학교 교장과 은진중학교 이사장을 역임한 교육자이자 간도 지역 한민족 자치기구인 간민회 회장을 맡았고 동시에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한 독립운동가였던 김약연(1868~1942) 목사의 기념비였다.

김 목사는 ‘간도 대통령’으로 불렸다. 1899년 국권이 넘어갈 즈음 함경도 회령을 떠나 국경을 넘어 명동촌으로 이주했다. 1909년 정재면과 함께 명동교회를 설립하고 독립운동 인재 양성을 위한 명동학교를 운영한다. 이곳 출신인 문재린 목사는 “처음 기도할 때 ‘아멘’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 꼭 소가 ‘음매’하는 것 같아 예배 도중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고 말했다. 아들 문익환 목사는 “일본을 일본(日本)이라고 부르기 싫어 왈본(曰本)이라고 발음했다”고 증언했다(송우혜, ‘윤동주 평전’). 기독교 신앙 공동체이자 독립운동 인재 양성소가 명동촌의 정체성이었다.

지금도 명동교회 앞마당을 지키고 있는 기념비의 모습.

1919년 3월 13일 명동촌 인근 룽징에서 대규모 만세 시위가 일어난다. 2만명의 한인들이 모여 ‘독립선언포고문’을 발표한다. 당시 이 지역 한인 인구가 20만명 정도였으니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상황을 고려하면 모일 수 있는 인원은 거의 다 참여한 셈이었다. 교회를 중심으로 미션스쿨 학생들이 주도했고 명동학교 브라스밴드가 대오를 이끌었다. 일본총영사관이 자리한 룽징 시내 중심가에서 낭독된 포고문은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보다 힘차게 시작한다.

“아(我) 조선민족은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노라, 민족의 자유를 선언하노라, 민족의 정의를 선언하노라, 민족의 인도를 선언하노라.”

포고문에 제일 먼저 이름을 올리고 서명한 김 목사는 교사 정재면과 함께 시위 당일 러시아 연해주에 있었다. 그곳에서 교포들과 임시정부 설립문제를 논의하던 중 룽징의 3·13 만세시위 소식을 듣고 급거 돌아왔다. 만세 시위는 일본영사관의 사주를 받은 중국군의 발포로 총 19명의 사망자를 낸 뒤 진압됐으며 김 목사는 가택 연금된다.

조선족 동포들은 1999년 ‘사단법인 룡정시 3·13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룽징 만세운동을 추모하고 있다. 룽징시 인민정부는 ‘3·13 반일의사릉’을 조성해 현장에서 숨진 이들의 묘소를 관리한다. 중국 공산당은 기독교계 인사들의 독립운동 흔적을 내버려 두거나 언급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데 룽징은 조금 다르다. 문화혁명 때 파손된 뒤 방치됐다가 다시 세워진 김약연목사기념비처럼 일부 흔적이 보존돼 있다.

초대 3·13 기념사업회를 맡은 조선족 출신 최근갑 회장은 회고록 ‘시련의 열매’에서 “1919년 2월 18일과 20일 김영학 목사 등은 비밀회합을 하고 각 교회와 모든 단체는 단결 협력하여 나라의 독립운동에 힘을 다 바칠 것, 연해주에서 발표될 독립선언서와 함께 시위운동을 진행할 것, 독립이 선포되면 각 단체 유력자는 룽징에 집결해 독립운동의 기세를 올릴 것을 결의했다”고 서술했다. 김영학 목사는 시위 당일 포고문을 낭독한 이다.

만세시위가 중국군의 발포로 유혈사태를 빚었을 때 사망자와 부상자를 급히 ‘영국덕’ 병원으로 옮긴 일도 기술돼 있다. ‘영국덕’은 ‘영국인들의 언덕’이란 뜻으로 당시 영연방 국가였던 캐나다의 장로교 선교부가 룽징 동쪽 언덕에 세운 제창병원과 은진중학교가 있던 지역을 가리킨다.

곽승지 옌볜과학기술대 교양학부 교수는 “룽징의 3·13 만세운동 이후 단둥 일대 서간도와 옌볜 일대 북간도 지역을 합쳐 70곳 이상에서 크고 작은 만세운동이 2개월에 걸쳐 지속해서 일어났다”면서 “이는 중국의 반일반제 시위인 5·4운동으로 이어져 대륙에 독립 정신을 전파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해외 한인들은 3·1운동을 기점으로 더욱 강력한 협의체 구축과 더 적극적인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곽 교수는 “한인이 퍼진 지역마다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들이 생겨나고 옌볜 일대에선 1920년대부터 본격적인 무장투쟁이 시작돼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룽징=글·사진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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