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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의 두글자 발견 : 시선] 보시기에 좋았으니 하나님 눈으로 보라

픽사베이

시선(視線)은 눈이 가는 길, 눈의 방향이다. 관심 있는 것에 계속 눈길이 간다. 눈길이 머무는 곳에 마음이 더해져 생각이 만들어진다. 보는 것이 생각을 자극하고, 감정을 움직이게 만든다. 시선엔 신비한 힘이 있어 삶의 방향도 바꾼다. 무엇을 보고 누구를 보며 어디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탄은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이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사탄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우리가 보지 못하게 만들고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대신 선악과를 바라보게 했다. 선악과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까지 했다.(창 3:6) 사탄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우리를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만든다.

생명을 살리는 시선

‘하나님의 시선’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즐겨 사용하신 단어는 ‘좋았더라’였다. 히브리어 ‘토브(Tob)’는 영어로 좋다(good)는 뜻이며 아름답고, 온전하며, 선함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시선, 토브가 가득하다.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창 1:4)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0)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2)

사랑이 담긴 시선은 생명을 살린다.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생명을 전해주는 존재란 것. 천지를 창조하시고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시선으로 가족과 이웃들을 대한다면 삶이 달라진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7년 기준 통계청 사망원인 통계상 자살사망자 수는 1만2463명으로, 하루 평균 3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살자·자살시도자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삶의 의미를 못 느낀다’는 것. 자살 시도자들은 사랑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호소한다. 사랑의 시선은 누군가에게 생명을 전해 주는 것이다. 가족들 또는 친구들의 사소한 말에 “이야! 정말 멋지네요!” “우와! 대단하군요!”라는 감탄사와 사랑의 시선을 보낸다면 분명 누군가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

부끄러움의 영성

신약성경 누가복음 18장 9~14절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바리새인은 혼자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사실 강탈하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 따위의 인간들과는 같지 않아요. 그뿐만 아니라 저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저는 한 주간에 두 번씩 단식하고 모든 수입에서 십 분의 일을 바칩니다.” 그는 타인을 경멸하고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기도를 했다. 반면 세리는 성전에서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며 기도했다.

당시 세리는 유대인들이 억압자로 여기는 로마 정부를 위해 일했기 때문에 미움을 많이 받았다. 세리들은 대부분 정직하지 못했고, 세금에서 떼어낸 돈으로 자기 호주머니를 불렸다. 유대인들은 세리를 경멸했다.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취하는 일반적인 자세였다. 세리는 성전 가까이도 못 가고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불쌍히 여겨달라며 통곡했다. 주님은 부끄러움을 고백한 세리에게 의롭다고 말씀하셨다.

분명한 것은 세리는 결단코 실패자가 아니란 사실이다. 주님께서 세리를 의롭다 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인정할 때 ‘의롭다’고 하셨다. 내가 의로운 사람은 아니지만,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주님이 의롭다고 칭해 주신다.

헨드릭 테르부르그헨의 ‘마태의 부르심’. 예수님께 지목 받은 세리 마태가 자신인지를 되묻고 있다.(마 9:9~13)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해야 할까. “죄인이오니 불쌍히 여겨주소서”라며 부끄러워할 줄 아는 ‘세리의 기도’가 필요한 세대이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3~14)

세리가 느낀 ‘부끄러움’은 정직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양심의 시선’이다. 자기성찰과 양심의 또 다른 언어이기도 하다. 시대의 아픔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성찰한 윤동주 시인에게서 우리는 ‘부끄러움의 영성’을 배울 수 있다.

그의 시 ‘별 헤는 밤’ 중에서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는 구절은 창씨개명 후 열등감과 부끄러움에 대한 고백이었다. 그는 부끄러움의 시선을 통해 깊은 자기성찰이 담긴 시를 쓸 수 있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서시’ 중에서)

‘쉽게 쓰여진 시’에서 육첩방은 바로 내 나라를 빼앗아간 남의 나라이다. 그는 육첩방에 앉아 공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독립하지 못한 조국과 부모님의 도움에 기대어 공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황에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느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쉽게 쓰여진 시’중에서)

고백을 통한 ‘은총’

우리는 어쩌면 부끄러움과 슬픔을 느끼는 감수성 그리고 스스로 성찰할 힘을 점점 잃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이 “적절치 않지만 부끄럽지 않다”고 말한다. 키르케고르는 “현재 우리의 위치를 알고자 한다면 지금껏 걸어온 길을 돌아보라”고 말했다. 어거스틴이 참회록을 통해 자신을 드러냈던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자기 이해와 직면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 이때 직면하는 자기는 부끄러움이며 수치이다. 아픔이며 슬픔이고 연약함이며 무너짐이다. 그러나 이런 자기 직면은 좌절로 귀결되지 않는다. 진정한 자기 고백과 회개를 통해 주님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연약함을 받아들일 때 연약함을 이겨낼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시편 22편 다윗의 탄식 시는 읽다 보면 어느새 찬송 시로 바뀐다. 깊은 고백을 통해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참된 회개의 시작은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벼랑 위에서 부정적인 자기 고백을 한다면 뛰어내리고 싶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 고백을 하면 ‘은총’을 발견한다. 부끄러움을 고백하며 기도했던 세리에게 하셨듯이 하나님이 의롭다고 칭해주기 때문이다.

우린 말씀 묵상을 통해 깊은 고백과 감격을 누릴 수 있다. 말씀 묵상이란 우리의 시선이 말씀에 머무는 것이다. 말씀에 시선이 오래 머물 때, 말씀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성숙한 믿음이란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적인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긍정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인생이 달라진다.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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