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화일로의 한·일 갈등에 한 가지 긍정적 측면이 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대기업에 부정적이던 정부가 그 국가적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한·일 갈등과 관련된 부분은 한시적으로 규제를 면제하고 52시간 근로도 부분적으로 완화해 주겠다고 한다. 막상 강적 일본을 상대로 경제전쟁에 돌입하니 전력이 될 만한 경쟁력을 가진 것은 대기업밖에 없다는 현실을 깨달은 것이다. 한·일 전력을 비교하면 우리가 압도적 열세다. 기술력과 자본력, 시장지위, 경영역량, 산업구조, 경제규모 등에서 여전히 일본에 한참 뒤져 있고, 1990년대 초까지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삼성전자 등 소수 대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일본을 앞서기 시작했고 지금은 대략 일본 경제의 80%까지 따라잡은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 경제가 해외에서 창출하는 국부의 대부분은 소수 대기업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과거와 달리 현재 우리 대기업들의 주 무대는 국내가 아닌 해외 시장이다. 삼성전자만 하더라도 해외 매출이 90% 가까이 된다. 이들의 국가경제 기여도는 막강하다. 10대 기업의 GDP 기여도는 45%에 가깝다. 삼성전자도 매출 대부분이 해외지만 반대로 법인세는 90% 가까이 우리나라에 납부한다. 만일 대기업들이 경제전쟁에서 패배하면 우리 경제는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되고 복지 등에 투자할 자원도 고갈될 것이다.

현대적 대기업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인데 세계사 최대의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때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일부 국가에서 여러 기능부서와 사업분야들을 내부에서 통합 조정하여 광범위한 시장을 대상으로 다양한 상품을 효율적으로 생산 판매하는 현대적 대기업들이 처음 등장해서 전대미문의 생산력 증대를 낳았다.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촉발된 18세기 말 산업혁명은 공장의 동력은 획기적으로 발전시켰으나 전체 경제의 규모나 생산력의 실제 증대는 그리 크지 않았다. 19세기 말 현대적 대기업들의 등장으로 과거 5000년 동안 축적된 인류 생산력 전체를 합친 것보다 수백 배 큰 생산력 증가가 불과 10년 만에 실현되었다. 현대 산업사회가 시작된 이래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국가는 예외 없이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알려진 스웨덴도 발렌베리라는 거대 재벌그룹이 광범위하게 비관련 다각화된 사업분야들에 걸쳐 전체 국가 GDP의 30%를 차지하고 있으며 독일도 폭스바겐, 지멘스, 보쉬 등 세계적 대기업들이 경제를 주도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 정부가 추진해온 중소 벤처 중심 경제로의 재편은 한계를 가진다. 벤처라고 하면 대부분 아마존이나 구글 같은 혁신적인 신생 기업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들은 20년밖에 안 된 젊은 기업이지만 절대 중소 벤처가 아니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세계 최대 기업들이며 광범위한 사업분야들로 비관련 다각화되어 있다. 벤처창업이 세계적으로 관심을 끄는 것은 중소기업 중심 경제로의 전환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거대 기업들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한두 가지 아이디어로 힘겹게 투쟁하는 무수한 중소 벤처들로만 구성된 국가경제는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없다.

21세기 혁신기반 경제의 주축은 중소 벤처가 아니라 신생 대기업들이다. 따라서 우리 경제가 21세기형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창업을 활성화하는 것 이상으로 이들이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가지는 글로벌 대기업으로 빨리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삼성전자처럼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대기업은 특정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소중한 국가적 자산이자 김연아나 BTS보다 훨씬 더 중요한 국가대표다. 문제가 있으면 그 부분만 해결해서 존경 받는 좋은 대기업으로 발전시키면 되지 적대시하는 것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엄청난 국가경쟁력을 스스로 파괴하는 행위다. 이런 면에서 대기업 성장을 억압하는 무수한 규제와 산업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아마존, 구글, 알리바바 같은 전대미문의 거대 기업들이 지배하는 21세기 글로벌 경제에서 우리의 앞날은 매우 어두울 것이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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