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1년 전보다 물가가 0.04% 싸졌다. 관련 통계 작성이 시작된 1965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물가가 낮다는 건 상품 가격이 그만큼 덜 올랐음을 의미한다. 언뜻 보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좋은 소식이다.

그러나 전체 경제를 생각하면 달갑지 않다. 물가는 상품을 사려는 수요와 팔려는 공급이 만나 결정된다. 만약 상품을 사거나 투자를 하려는 수요가 없어 물가가 하락하는 것이라면 심각하다. 가격이 하락하면 시장의 생산이 감소하고, 이것은 고용 감소와 임금 하락에 이어 경기 침체를 유발한다. ‘수요 급감→가격 하락→생산 위축→경제 공황’이 작동한다. 물가 하락과 경기 부진은 서로 영향을 주면서 악순환도 가져온다. 지갑을 닫은 경제 주체들이 물가가 하락하면 물건 가격이 더 떨어질 것으로 보고 투자와 소비를 더 미룬다. 최근 실질금리(명목금리-물가 상승률 전망)가 계속 높아지는 건 이런 흐름이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 같은 위기를 우리는 ‘D의 공포’라고 부른다. 디플레이션이다. 정부는 일단 D의 공포에 선을 긋는다. 통계청이 매달 발표하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60개의 상품 및 서비스 가격을 1년 전과 비교한다. 하지만 각 항목이 전체 물가 상승에 기여하는 가중치는 다르다. “물가가 낮은데, 마트에 가면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일반 시민들의 푸념이 나오는 이유다.

지난달 물가는 사실상 장바구니물가도 낮았다. 1년 전에 비해 기후가 안정적이면서 농축수산물 가격에 기저효과가 발생했다. 채소, 과실 등이 포함된 신선식품지수는 전년 대비 13.9%나 하락했다. 460개 품목 가운데 구입 빈도가 많은 141개 품목을 별도로 꼽는 생활물가지수(장바구니물가)도 0.4% 감소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공급 측 가격도 눌렀다. 정부는 전기·수도·가스요금, 의료비, 통신비, 교육비 등의 가격이 크게 오르지 않도록 관리한다. 소비자물가지수 조사 대상 품목 460개 중 관리 물가 대상은 40개로 추정된다. 정부는 통신비·등록금 인하 등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 문재인정부 들어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무상급식·보육 등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관리물가는 좋은 복지 정책이지만 동시에 물가를 끌어내린다. 지난달 학교 급식비와 병원 검사료는 전년 대비 각각 40.9%, 7.3% 하락했다.

결국 정부는 저물가의 원인을 기저효과와 정부 정책 효과로 본다. 그래서 아직 경제 주체들의 수요가 부족해 나타나는 D의 공포는 아니라고 본다. 한국은행은 관리물가 등을 제외하면 물가 상승률이 1%대 초중반까지 올라간다는 입장이다.

최근 저물가 추세에는 산업 구조 변화도 있다. ‘아마존 효과’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은 온라인 구매 증가가 전체 물가 상승을 끌어내리는 것이다. 아마존 효과는 연평균 0.2% 포인트 안팎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시적 요인을 제거해도 물가 상승률이 1%대에 머문다는 건 고민할 부분이다. 한국은행의 물가안정 목표는 2%다. 물가 상승률이 1%대에서 0%대로 주저앉은 데엔 기저효과와 공급 측 요인이 크지만, 1%대에서 2%대로 올라가지 못하는 이면에는 총수요 부진이 일정 부분 존재한다. 지난 7월 소비지표는 전월 대비 두 달 연속 감소했다. 경기 부진도 국내총생산(GDP) 물가지표에 반영되고 있다. 3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나타낸 GDP디플레이터(경상GDP/실질GDP) 상승률에는 반도체 가격 하락 등이 반영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 저물가에 총수요 부진인 무기력증이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정부는 내년 단기 적자를 감수하더라도 513조5000억원을 쓰는 확장적 재정정책에 승부를 건다. 많은 돈을 잘 써야 한다. 정부의 투자 일부는 오히려 민간과 경쟁해 구축 효과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응하는 소재·부품 독립화도 좋지만 고령화, 산업 위기 등을 돌파할 더 구조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나쁜 지표와 대내외 악재를 방어하느라 정부 정책이 단기간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빠른 대응은 좋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뜯어볼 여유가 없는 건 아닐까. D의 공포가 맞다, 아니다라는 다급한 논쟁에서 벗어나 심호흡을 하고 찬찬히 더 멀리 볼 때다.

전슬기 경제부 기자 sgj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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