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학기가 시작되자 예술대학 교정을 에워싼 숲이 매혹적인 초록으로 변하고 있었다. 대개 예술대학은 학교의 후미진 구석이나 언덕의 맨 꼭대기에 위치해서 등교(登校)라는 말이 실감 난다. 등하굣길 언덕을 오르내리다 보면 예술 창작 과정이 끊임없는 운동에 다름 아님을 곱씹게도 되고 창작 교실이 숲 가까이 있기에 눈을 맑게 밝힐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예술 창작은 온몸의 감각을 깨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사진예술은 시각 위주로 에너지가 재편될 수밖에 없기에 창작자의 다양한 감각을 일깨우는 방법으로 영육(靈肉)의 단련은 필수 덕목이다. 창작의 출발은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개별적 자아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찾고 만들어가는 깨어 있는 자의식과 자유의지는 예술의 심미안을 형성하는 데 기본이다. 당연히 창작자의 심미안의 세계가 깊어질수록 그 작품을 감상하는 향유자의 시각도 풍요로워질 수밖에 없다.

이번 학기에도 어김없이 ‘자화상’을 주제로 사진 실기 수업을 계획했다. 사진 수업이 처음인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시간이다. 셀프 포트레이트를 촬영하면서 카메라에 대한 분석적 이해를 높일 수 있고, 내가 피사체가 돼 카메라와 ‘나’ 사이의 거리를 헤아리며 나를 객관화하는 계기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술작품의 주인공이 되는 ‘사건’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 ‘나는 무엇일까’를 놓고 내가 원근법의 소실점이 되기도 하고, 카메라가 주인이 되기도 하는 변증법적인 게임이 시작된다.

카메라 앞에서 나는 카메라가 상상하는 내가 되기도 하고, 나라는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가 되기도 한다. 카메라에 찍힌 내가 전부일 수도,무수한 ‘나’들의 파편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리고 카메라와 나는 서로의 거울상처럼 서로를 되비쳐 낸다. 이 거울은 조리개처럼 열려 있으면서 동시에 닫혀 있다. 자화상 수업은 자기가 찍힌 사진이 거울처럼 자기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시간이다. 사진을 매개로 나를 ‘다시(re) 비추는(flection)’ 반성의 계기인 셈이다.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사진술인 다게레오타입은 사진의 주재료가 은(silver)이다. 노출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어도 이미지가 선명해서 당시(1840년대) 초상사진을 소유하려는 사람들의 열망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사진 자체가 은판이다 보니 사진을 보기 위해서는 비스듬히 각도를 조절해가며 봐야 사진에 찍힌 인물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각도가 맞지 않으면 거꾸로 사진을 보는 사람이 거울상처럼 맺힌다. 사진을 좀 더 선명하게 보기 위해선 은판의 주변부를 깨끗이 닦아내야만 했다. 사진에 찍힌 사람을 제대로 보기 위해 거울을 깨끗이 하니, 사진을 보는 내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공생 이미지였던 것이다.

그렇다! 사진의 탄생에는 거울신화가 있었다. 사진은 나와 너의 얼굴을, 세계상을 비추는 거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사진촬영의 과정은 거울의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고 경계를 허물며 동일성 속에서 ‘다름’과 ‘차이’를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진은 거울처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쳐내지 않는다. 상을 왜곡하기도 하고 분열하면서 다시 직조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완벽한 표면을 가진 거울은 없다. 거울에 반영된 세계는 실제 사물과 일치할 수도 있지만 전도된 양상 곧, 환상과 허위일 수도 있다.

인간은 저마다 하나의 거울이다. 그 거울은 나를 비추고 때론 나의 표상을 새롭게 만들기도 한다. ‘거울 단계’의 유아처럼 거울 속의 나를 손에 거머쥐기도 하고, 나르시시즘의 몽환에 빠지기도 한다. 폭력적인 거울은 끝없는 분열과 소외를 부추기면서 척박하고 어두운 곳의 남루함을 정치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거의 모든 것을 보는 아르고스처럼 세계를 자기 눈으로 수렴하려는 엄청난 괴물도 있다. 지난 한 달여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이슈를 생각한다. 모두 거울을 잃어버린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다시 너에게 나를 비춰야 할 시간이다.

최연하 사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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