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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다리가… 유학 포기하고 귀국 ‘장결핵’으로 사경

안호성 목사의 사자처럼 담대하라 <3>

안호성 울산온양순복음교회 목사가 2002년 2월 충북대 졸업식에서 어머니, 여동생, 누나(왼쪽부터)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1년쯤 지나자 영국유학 생활에 적응했다. 2000년 드디어 힘겹던 삶에 해 뜰 날이 찾아왔다. 유럽 전역을 기차로 다니며 배낭여행을 할 기회가 온 것이다. 비행기 표만 끊고 영국에 날아온 내게 나 홀로 배낭여행은 일도 아니었다.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스위스 등 유럽 일대를 신나게 돌아다녔다. 보름간의 여행을 마치고 영국에 돌아왔다. 이층버스에서 내리는데 갑자기 한쪽 다리가 이상하게 저렸다. 처음엔 며칠 지나면 좋아지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다리를 쓸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영국에는 외국인 유학생을 무료로 치료해주는 제도가 있다. 하지만 피가 나고 뼈가 튀어나올 정도의 심각한 외상이 아니면 무조건 순서대로 기다려야 한다. 진료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고 처방받기 위해 또 기다리고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줄만 서다가 하늘나라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도 없는 곳에서 치료받기가 힘들고 해서 결국 유학 생활을 포기했다. 무엇보다 한식이 그리웠다. ‘쫄면, 냉면, 우동, 닭갈비, 감자탕, 막국수, 족발, 짜장면….’ 한국음식이 그리울 때마다 공책에 적었는데 500개가 넘었다.

부랴부랴 귀국해 부모님이 계신 청주에 도착했다. ‘집에 가면 얼큰한 순두부찌개부터 먹어야지’ 했지만 입에 음식이 통 들어가지 않았다. 입맛을 완전히 잃었다. 목으로 넘길 수 있는 것은 요구르트뿐이었다. 몸이 음식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다리가 저리니 정형외과부터 갔다. 혈액검사부터 CT촬영까지 다 해봤는데, 전혀 이상이 없었다. “참 이상하네요. 다리에는 이상소견이 없는데 어떻게 다리가 아프다는 것일까요.” 환자인 내게 의사 선생님이 되물었다.

몇 군데 병원을 돌았다.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해 링거 주사만 맞았다. 신장결석이 의심된다면서 치료를 병행하기도 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물리치료도 받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먹지 못하니 얼굴이 점점 말라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무게가 급격히 줄었다. ‘병명도 모르고 병원에서 이렇게 검사만 받다가 죽을 수도 있구나’하며 절망했다. 키가 179㎝인데 몸무게가 38㎏까지 줄었다. 뼈에 피부가 달라붙었다는 말 그대로 피골이 상접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병원에서 염증 수치가 매우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니, 그동안 뭐했어요.” “뭘 하긴요. 이것저것 검사도 받고 신장 결석 치료도 받았습니다. 물리치료도 받고요.”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일단 복부 부위 염증이 심해졌으니 개복해서 수술 먼저 합시다. 응급상황입니다.”

장결핵이었다. 비몽사몽 간에 수술실에 들어갔다. 수술이 끝났지만, 온몸에 힘이 전혀 없었다. 숨쉬기조차 힘겨울 정도였다. 수술 집도의는 부모님께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환자의 장 상태가 너무 나쁩니다. 장기 전체가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장에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있고 고름이 가득 차서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닫았는데,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의식이 돌아왔을 땐 내 옆구리에 큼지막한 튜브가 박혀있었다. 배 속에 있는 고름을 빼내기 위해 임시로 박아놓은 튜브라고 했다. 옆구리에 붙여놓은 거즈에선 냄새가 났다. 생전 처음 맡는 악취였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역했다. 시궁창 냄새나 걸레 빤 냄새보다 지독했다. ‘송장 썩는 냄새가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차마 거울을 볼 수 없었다. 고개조차 돌리기 힘겨웠다. ‘이게 사망이라는 거구나. 이대로 죽는 거구나.’ 질병이라는 문제 앞에 마음이 무너지니 자포자기 상태가 됐다. 기력이 모두 쇠하고 나니 신음소리도 나지 않았다. 죽음 앞에 초라한 실존을 발견했다. “주… 주님, 살려만 주시면 주의 종이 되겠습니다.”

아침마다 의사가 와서 옆구리에 끼워 둔 거즈를 교환했다. 고름이 잔뜩 밴 거즈에선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자다가 몸을 뒤척여 튜브가 옆구리 상처를 건드리기도 하면 머리카락이 쭈뼛 솟을 정도로 아팠다.

어머니는 병상 옆에서 물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하셨다. 아들에게 행여 상처라도 입힐까 봐 더러운 좌욕실에서 끼니를 때우셨다.

안호성 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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