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개발자로 일하는 박모(28·여)씨는 지난달 말 직장 동료 A씨(35)에게 생소한 말을 들었다. A씨는 가을 이사를 앞두고 ‘가전제품 사재기’를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박씨는 “전시(戰時) 등을 대비해 라면 사재기하는 건 들어봤어도, 비싼 가전제품을 사재기하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박씨가 A씨 생각을 이해한 계기는 그날 저녁 뉴스였다. 다음 달 1일부터 소비세율이 기존 8%에서 10%로 오른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이 ‘10월 경제위기설’에 휩싸여 있다. 그 중심엔 소비세 인상이 있다. 일본 정부는 2015년 10월부터 소비세율을 올릴 계획이었지만, 선거 등 정치 이슈에 밀려 다음 달 1일까지 연기해 왔다. 초고령화로 복지예산 부담이 커지자 소비세 인상으로 ‘돌파구’를 찾겠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일본 내부에선 ‘잃어버린 20년’의 악몽을 떠올린다. 소비세 인상으로 내수 침체가 예상되는 데다 ‘엔고(엔화가치 상승) 현상’에 따른 수출기업 타격이 우려된다.

기로에 선 일본 기업들

일본 경제매체 닛케이아시안리뷰(NAR)는 지난달 13일 소비세 인상을 앞두고 기업들 사이에서 포착되는 몇 가지 현상을 소개했다. 먼저 때아닌 호황이다. 전자제품 소매업체인 빅카메라(Bic Camera)는 올여름 뜻하지 않게 높은 판매실적을 올렸다. 하나에 20만~30만엔(약 220만~330만원)에 이르는 올레드(OLED) TV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배 가까이 늘었다. 빅카메라 관계자는 “소비세 인상을 앞두고 소비자들이 미리 물건을 사들였다. 올 하반기 판매 수요가 급감할 걸 생각하면 마냥 웃을 수도 없다”고 했다. 카시오(CASIO)컴퓨터는 지난 6월 소비세 인상분을 바로 물가에 대입해주는 새 계산기를 내놔 ‘대박’을 치기도 했다.

가격표에 ‘꼼수’를 부리는 기업도 등장했다. 패스트푸드 체인점 모스버거(Mos Burger)를 운영하는 모스푸드 서비스는 이달부터 전 메뉴에 ‘과세 전 가격’을 표시하기로 했다. 소비자들이 소비세 인상에 따른 가격 부담을 최대한 느끼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다. 의류 소매업체인 시마무라(Shimamura)도 옷 가격표에 세금을 제외한 가격을 적기로 했다.

기껏 키운 회사 규모를 일부러 줄이는 기업도 있다. 일본 시코쿠 지방 남서쪽에 있는 한 대형마트 사업자는 지난 5월 회사 자본금을 9800만엔(약 10억7000만원)에서 5000만엔(약 5억5000만원)으로 삭감했다. 회계상 ‘대형기업’이 아닌 ‘중형기업’으로 분류되면 혜택을 받을 수 있어서다. 이 회사 대표는 “다음 달 소비세 인상과 함께 도입될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금을 받기 위해 신용도 충격을 감수하고서라도 규모를 줄였다”고 토로했다. 일본 신용조사기관 데이코쿠(Teikoku) 데이터뱅크는 지난 1월부터 7월까지 자본을 줄인 사업장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3.5% 늘었다고 발표했다.

왜 소비세 인상에 집착하나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소비세 인상을 단행하려는 배경에는 국가부채가 있다. 일본은 국내총생산(GDP)의 배를 훌쩍 넘는 공적 부채를 안고 있다. 초고령화사회로 접어들면서 지난해 사회보장비는 32조엔(약 325조원)을 돌파했다. 정부의 일반회계 지출에서 33.7%를 차지하는 수치다. 1989년 18.8%에 불과했던 비중을 감안하면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직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는 2025년에 모두 75세를 바라보게 된다. 갈수록 복지에 들일 나랏돈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런데 정부가 낼 수 있는 빚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고령자를 포함한 모든 국민이 납부하는 소비세를 인상해 복지 재원을 조달하겠다는 셈법을 갖고 있다. 법인세와 소득세는 쪼그라든 근로세대에만 거의 의존하기 때문에 소비세 인상이 더 효과적이다. 여기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9.3%에도 못 미치는 소비세율은 아베 정권에 정치적 명분도 준다.

차츰 다가오는 ‘10월 경제위기’

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원인이 다양한 경로로 일본 경제를 위협하고 있고, 그 방아쇠를 ‘소비세 인상’이 당길 수 있다고 분석한다. 소비세와 경기 침체의 연관성을 보려면 일본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989년 소비세(3%)를 최초로 도입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는 별도의 스캔들로 사임했지만, 97년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는 5%로 소비세를 올린 뒤 심각한 경기 침체를 야기했다는 비판을 받고 물러났다. 자민당은 98년 참의원 선거에서 패했다. 2014년 아베 총리가 8%까지 소비세를 올렸을 때도 일본은 불황에 빠졌었다.

프랑스 소시에테제네랄(SG) 은행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아이다 다쿠지는 “일본이 2014년 소비세를 올린 뒤 내수 침체에 갇혀 기업들도 저축에만 ‘올인’했다”고 진단한다. 기업들은 정리해고를 단행하고, 정부에 추가 재정 투입을 요구했다.

이뿐이 아니다. 91년부터 지속된 ‘잃어버린 20년’의 이면에는 엔고 현상도 한몫했다. 엔고는 일본 수출기업의 가격경쟁력 하락을 부른다. 2008년 금융위기, 2011년 남유럽 재정위기,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우려 때도 안전자산인 엔화로 글로벌 자금이 몰리면서 엔고 현상이 빚어졌다. 그때마다 일본은 경기 침체를 겪었다. 최근 미·중 무역전쟁과 유럽의 경기 둔화도 엔고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더욱이 일본의 수출 규제로 촉발된 한·일 통상갈등에 따른 한국의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도 무시할 수 없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지난달 13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일본 관광 불매운동으로 일본 경제성장률이 0.1% 포인트 떨어지고 고용도 9만5785명 줄어들 것이라고 추산했다. 한국인 관광객을 즐겨 찾던 일본 숙박시설은 서서히 한계점에 봉착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내놨다.

최지웅 기자 woo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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