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OCN)에서 그로테스크한 공간 연출을 총지휘한 박재현 미술감독. 그는 “드라마는 영화와 달리 실시간으로 네티즌들의 반응을 볼 수 있어 신기하고 행복하다”며 “발랄한 미장센을 담은 멜로물로도 찾아뵙고 싶다”고 했다. 최현규 기자

에덴 고시원은 늪을 연상케 한다. 벗어나려 애쓸수록 깊이 빠져드는, 낙원을 뜻하는 이름과 달리 의뭉스러운 타인들이 질척이는 끔찍한 지옥.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OCN)는 상경한 청년 윤종우(임시완)가 이 허름한 고시원에 몸을 들이며 겪는 미스터리한 일들을 숨 막히게 풀어낸다. 살인을 저지르는 낯선 이들의 공간 속 종우의 불안은 시청자에게 고스란히 옮겨온다.

잘 알려졌듯 누적 조회 수 8억회에 달하는 동명 웹툰이 원작이다. 지난달 31일 첫 방송 직후부터 높은 싱크로율과 몰입감으로 연일 화제 몰이를 했는데, 괴기함이 듬뿍 묻어있는 배경의 힘이 컸다. 어둠 속으로 뻗은 낡은 고시원 복도와 벽지에 눌어붙은 곰팡이, 샤워장의 녹슨 수도꼭지는 짙은 스산함을 풍긴다.

박재현(43) 미술감독은 고시원이란 공간을 이토록 을씨년스럽게 조각해냈다. 영화계에서 그로테스크한 공간 연출로 정평이 난 박 감독은 ‘인랑’(2018) 등에서 쌓아온 그간의 노하우를 여기에 쏟아부었다. 최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만난 박 감독은 “세트장 한 곳에 이처럼 모든 에너지를 쏟은 작품은 처음”이라고 했다.

약 반년에 걸친 대작업이었다. 세트를 설계하고 캐릭터에 맞춘 소품을 만든 후 물감과 페인트로 곰팡이와 녹을 일일이 그려 세월의 흔적을 덧입힌다. 모티브는 조사차 방문한 경기도 파주의 30년 된 고시원에서 얻었다. 벽 질감은 싱가포르, 브라질 등의 교도소를 참고했다고 한다.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포인트는 “비틀기”였다.

“엄복순(이정은)부터 모든 캐릭터가 일반인과 다른 뒤틀린 정서를 가지고 있는데, 삐뚤어진 그런 느낌을 종우와 시청자에게 전하고 싶었어요. 복도를 비틀고, 방들을 지그재그로 배치하고 기둥도 비대칭으로 설계를 했죠. 덕분에 음침함이 잘 살아난 것 같아요.”

배우들은 어땠을까. 박 감독은 “시완씨가 ‘이 샤워실에서 씻으면 병날 것 같다’고 하더라”며 웃었다. 서문조 역 이동욱은 그에게 “너무 갑갑하다. 일부러 세트장을 작게 만드신 거냐”고 물었다고 한다. 박 감독은 “일부러 복도와 방을 작고 꽉 차게 만들었다. 그런 자연스러운 압박감을 주는 공간 설계도 미술감독의 일”이라고 했다.

“종우 방은 특히 어려웠어요. 생필품 몇 가지 빼곤 가져다 놓은 짐이 하나도 없는데, 주인공 방이잖아요. 벽지를 바꾸고 소품을 넣고 빼고를 수없이 반복했죠. 벽지 때, 먼지 하나까지 정말 디테일하게 그렸습니다(웃음).”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박 감독은 영화 ‘놈놈놈’ ‘악마를 보았다’ 등에서 미술팀장으로 활동하다 2012년 ‘분노의 윤리학’을 시작으로 미술감독의 길을 걷게 됐다. ‘타인은 지옥이다’는 영화 세트장을 지휘하던 그에게 빠르게 발전 중인 국내 드라마의 가능성을 새삼 확인시켜준 작품이었다. 박 감독은 “드라마도 미술적으로 많은 걸 표현할 수 있는 공간임을 느꼈다”고 했다.

“넷플릭스로 시청자 눈높이가 한층 높아졌다는 걸 느껴요. 극 미장센에 더 많은 투자가 이뤄질 것이고, 또 이뤄져야 하죠. 뛰어난 퀄리티의 드라마들이 계속 만들어질 텐데, 타인은 지옥이다가 그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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