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두글자 발견 : 얼굴] 예수 만나고 알고자 한다면 인생이 주는 굵은 주름 두려워 말라


얼굴은 신체에서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하는 지체이다. 성경에서 낯(창 4:14) 안색(창 4:5)으로도 번역되며 간혹 인격(人格)이나 그 사람(존재) 자체를 상징한다. 얼굴을 가리는 것은 하나님의 편에서는 관계 단절이나 은혜와 복의 차단 혹은 거절을 의미하고(사 59:2, 겔 39:24) 인간 편에서는 경외심(출 3:6, 왕상 19:13)이나 극한 슬픔과 수치를 뜻한다.(삼하 19:4)

성경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라는 말이 많이 쓰인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얼굴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임재를 거두신 것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얼굴은 다양한 암시와 은유를 함축한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것은 자기를 철저히 부정하는 행위이자 상대방에 대한 극진한 존경과 경배를, 얼굴을 앞으로 향하는 것은 굳은 결심을, 얼굴을 구하는 것은 도움이나 관계 회복을, 얼굴을 드는 것은 회복과 영광을, 얼굴을 벽으로 향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기대를 버리는 동시에 하나님만을 소망한다는 신앙적 자세를 뜻한다. 하나님이 얼굴을 누구에게 비취신다는 것은 은총과 사랑 베풂을, 누구에게로 얼굴을 향하신다는 것은 의인에게는 구원과 긍휼과 은총을, 악인에게는 심판과 형벌을 의미한다.

가시면류관 쓰신 하나님

성경에 표현된 공의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어떤 모습일까. 구약성경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모습을 불꽃과 소리, 빛과 공기의 진동으로 서술한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가 되실 만큼 광대하실 뿐 아니라 자신을 찾는 어린 새들까지 돌보실 만큼 다정한 분이시다. 인간의 머리로는 하나님이 정확하게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기도 한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 덕분이기도 하다. 화가들이 그린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니”(창 1:27)란 말씀에 근거한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의 ‘아담의 창조’에 그려진 하나님은 건장한 체격의 카리스마가 넘친다. 흰머리에 수염을 휘날리는 신비스러운 모습이다.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프레스코화 ‘천지창조’의 한 부분이다.

영국의 신학자 톰 라이트는 저서 ‘예수’에서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나사렛 예수님은 하나님이 성육신하셨을 때의 모습을 보여준다. 세상의 죄와 고통의 짐을 지고 십자가에서 죽은 바로 그 순간에 예수는 가장 분명한 하나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참 하나님은 막연한 에너지나 기체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분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가시관을 쓰셨다.… 하나님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랑으로 활활 타오르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언제고 인간이 필요로 할 때면 이 사랑을 실제 삶에 부어 주시는 매우 인격적인 분이셨다.”

화가들에게 얼굴은 영원한 소재다. 특히 예수님의 얼굴은 12세기 성화 이콘으로 초상이 등장한 이후 많은 화가에 의해 탐구되기 시작했다. 중세 말과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그리스도가 실제 인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인간적인 형상으로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했으니 완전한 인간을 묘사할수록 그에게 가까이 갈 것이라고 믿은 데서 기인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초상을 그리기 위해 얼굴을 찾아다녔다.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 렘브란트(1606~69)는 예수님의 초상을 그리기 위해 유대인 지구에 들어가 살면서 예수님의 초상을 다각적으로 살피며 그림을 그렸다. 그가 그린 예수님의 얼굴은 르네상스 미술의 웅장하고 범접하기 힘든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다. 인간적인 체취가 물씬 풍기는 초상이다. 성스러워 보이지만 매우 겸허하고 자애로운 눈빛과 연민을 느끼게 하는 인간 예수님이다. 눈은 맑고 몸은 건장해 보인다. 누구라도 이해하고 용서할 것 같은, 자애롭고 넉넉한 넓은 가슴의 소유자로 보인다.


삶의 현장에 있는 예수 얼굴

프랑스 화가 루오(1871~1958)가 많이 그린 그림 가운데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다. 그는 심판하는 그리스도가 아닌 용서하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렸다. 영광에 찬 그리스도가 아니라 가련한 광대와 농부들, 거리의 여인들, 현실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고난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작업복을 입은 예수님의 모습에서 보이듯,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예수의 얼굴을 찾아 그리려 했다. 내면의 슬픔을 새기는 듯, 슬픔이 가득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렸다. 제1차 세계대전의 먹구름이 짙게 짓누르고 있던 무렵이었다.

초기 기독교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이자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우리의 삶 속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마음의 눈’을 치유하는 것이다. 얼굴이란 우리를 향해 자기를 드러내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을 닦아가는 마음의 자세에 따라 달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또 고급스러운 성전이 아니라, 노동과 배신의 현장에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치열하게 살아보지 않으면 진지하게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한다. 시련은 가슴에 멍을 남기지만, 더러는 그 멍울 속에서 은혜가 피어난다. 그래서 예수를 만나고 알고자 하는 사람은, 인생이 주는 굵은 주름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프레드릭 비크너는 하나님은 여러 얼굴(모습)로 우리를 찾아오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굳이 우리가 먹이지 않아도 되는 배고픈 사람들, 굳이 우리가 위로하지 않아도 되는 외로운 사람들, 우리가 언제든 자유롭게 등을 돌릴 수 있는 사람들의 절박한 필요의 모습으로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처분에 자신을 맡기신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분별과 냉정함과 잔인함으로 하나님께 고통을 가할 수 있다는 의미이자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비크너의 ‘어둠 속의 비밀’ 중) 우리가 바라보고 좇아야 할 북극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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