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보니것의 고향인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한 레스토랑에 작가의 그림과 그가 쓰던 타자기가 전시돼 있다. ‘제5도살장’ ‘고양이 요람’ 등으로 유명한 보니것은 미국 저항문학의 상징이었다. AP뉴시스

커트 보니것(1922~2007)의 유고 작품집 ‘아마겟돈을 회상하며’가 국내에 출간됐다. 굳이 ‘작품집’이라 표현한 이유는 편지글과 연설문, 에세이와 단편소설이 망라된 책이어서, 어떤 하나의 장르로 이 책을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미국 최고의 풍자 소설가로 평가받는 보니것의 작가적 신념과 가치관의 총체라 할 만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드레스덴에서 겪은 ‘포로’ 경험이 그의 자양분이 되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보니것에게 ‘전쟁’이라는 코드와 거기에 뿌리를 둔 휴머니즘적 성찰은 그의 작품 세계 자체다.

‘아마겟돈을 회상하며’에 실린 모든 작품은 전쟁 체험에서 파생된 작가 정체성의 산물이다. 문학에 반영되는 전쟁 체험은-예컨대, 우리 문학에서의 손창섭의 이미지처럼-고통과 죽음의 의식으로 점철되는 것이 어찌 보면 자연스런 흐름일지 모른다. 그러나 보니것의 경우, 전후문학에 대해 늘 그래왔듯 ‘엄근진’(엄숙 근엄 진지의 첫 글자를 조합해 만든 신조어)의 방식으로 접근했다간 뒤통수 맞기 일쑤다. 이번 책에 실려 있기도 한 ‘인디애나폴리스 클로우스 홀 연설문’에서 보니것은 스스로를 “세계 최고의 또라이”라고 평한다. 이 책의 원고들을 엮은 그의 아들 마크 보니것은 서문에서 아버지는 농담을 사랑한 사람이었다는 걸 강조하기도 한다.

책에 실린 작품 중 하나인 ‘K. 보니것 주니어 일병의 편지’는 보니것이 전쟁포로 귀환자 수용소에서 실제로 보낸 편지다. 청년 보니것은 연속되는 ‘죽을 고비’를 유쾌하게 술회한다. 죽음의 경계 앞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을 설명한 후 마지막엔 “하지만 저는 죽지 않았어요”를 라임처럼 반복하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그의 소설들이 놀이와 유희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전쟁과 죽음의 체험을 반대급부인 ‘농(弄)’과 ‘쾌(快)’로 상승시킴으로써 보니것만의 세계관을 구축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가령 이런 소설을 보자. ‘1951년의 행복한 생일’은 전쟁 이후 인간에게 남겨진 상흔을 너무도 상징적이고 선명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제목에 드러나듯이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51년 유럽. 한 노인은 여섯 살 소년과 함께 “지하 묘지 같은 저장고”에서 “기적처럼” 살고 있다. 그들을 발견한 군인들이 지급품 보급을 위해 서류를 작성하게 하지만, 노인은 소년의 생년월일을 몰라 서류를 작성하지 못한다. “전쟁이 끝나던 날, 피난민 여자 하나가 그의 품에 아기를 남겨두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인과 소년은 내일을 소년의 생일로 정하고, 이튿날 소나무 숲으로 소풍을 떠난다. “오늘은 전쟁에서 벗어날 거야. 숲으로 갈 거다.”

몇 해 전 나는 아내와 함께 프랑스 여행을 계획했다. 비행기 티켓도 끊었고 여행 경로에 따라 숙소들도 어느 정도 예약을 해놓은 상태였다. 여행 블로거들의 정보와 여행 가이드북을 토대로 한 맛집 리스트가 거의 완성될 즈음이기도 했고, 심지어 파리 근교에 살고 있는 대학 선배에게 졸업 후 처음으로 연락해 파리에서 만나기로 약속까지 잡은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던 때, 아내와 나는 충격적인 뉴스를 접하고 말았다. 파리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한 것이었다.

이미 예약한 것들도 있고 해서 여행을 그냥 감행할까 고민도 해봤지만, 보도되고 있는 사태의 심각성이나 파리 현지 선배의 조언 등을 따져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계획은 포기했으나 유럽 여행을 포기하진 못했다. 그렇게 선택하게 된 곳이 독일이었다. 몇 주 동안 독일을 일주하는 것으로 계획은 수정됐고, 그대로 우리는 여행을 떠났다. 여행의 감상을 요약하자면, 독일은 깔끔하게 아름다운 나라였다. 그런데 여행을 지속할수록 그 ‘깔끔함의 아름다움’이란 것이 내가 체험하지 못한 어떤 것으로 인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버릴 수가 없었다. ‘전쟁’ 말이다. 파리의 테러를 피해 반강제적(?)으로 선택된 여행지가 독일이었다는 생각이 거기에 더해지면서 내 여행의 감상에는 계속 ‘진정 전쟁은 끝난 것인가’라는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임경섭·출판편집자>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