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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문수정] 소비자 전성시대


무언가를 살까 말까 고민한다면, 그 고민이 가격 때문이라면, 이렇게 권한다. “지금이야말로 무언가를 사기에 딱 좋은 때입니다.” 누군가에게 돈을 쓰도록 선뜻 권했다가 훗날 멱살이라도 잡히면 어쩌려고 이러나. 하지만 이 단호함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유통 분야를 취재하다 보면 이른바 ‘득템’의 기회를 먼저 알게 된다. 유통 출입을 맡게 된 초창기에는 보도자료로 할인 행사 정보를 먼저 알게 되면, 두근두근했다. 평상시 ‘호갱’의 조건을 두루 갖춘 미미한 소비자로서 ‘특가’ ‘한정판매’ ‘파격 세일’ 등등의 문구를 볼 때마다 조마조마해졌다. 아아, 이번엔 득템할 것인가.

정보력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안타깝게도 번번이 타이밍 공략에 실패해 만족스러운 득템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깨달은 바가 있었으니, 기회는 계속된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유통가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알고 보면 1년 365일 할인 행사 중이다. 정부가 야심 차게 시작했던 ‘코리아 세일 페스타’가 2년 연속 시시한 실적을 냈던 것은 연중 세일을 경험하고 있는 소비자들에게 색다른 매력을 선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올해는 그래서 ‘블랙프라이데이’ 시즌인 11월로 때를 옮겼다고 한다.

할인판매는 촘촘히 곳곳에서 다양한 규모로 펼쳐지고 있다. 롯데, 신세계 등 오프라인 강자들이 올해 온라인 시장 공략을 본격화하면서 시장 전체가 후끈 달아올랐다. 일단 고객을 업체로 모시기 위해 기본으로 탑재하는 건 ‘특별한 배송 서비스’다. 익일배송, 다음날 새벽배송, 당일배송, 3시간 이내 배송 등이 등장하며 물건을 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원하는 배송시간을 지정할 수도 있고 물건을 놓아둘 장소도 구체적으로 주문할 수 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사실 각종 특화된 배송 서비스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밑 빠진 독”이라면서도 “일단 이커머스에 발을 들인 이상 배송 서비스를 포기할 수도 없다. 포기하면 도태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토록 소비자 친화적인 유통 환경이 만들어진 적은 없었다. 선택지가 넘쳐나서 맞춤하게 고르기는 쉬워졌고, 정보가 넘쳐나서 속아 넘어가거나 어리석은 실수를 할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몸을 바지런히 움직이지 않아도 원하는 게 원하는 시간에 문 앞에 당도해 있다. 구하기 힘든 것도 별로 없다. 불매운동으로 소비자의 힘을 보여줄 수도 있다. 물가상승률 0%대 시대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 같다. 공급자 증가에서 비롯된 기업 간 경쟁 심화와 소비자 주권 상승이 맞물려 물가를 누르는 효과가 빚어졌다. 이미 물가가 높게 형성돼 있어서 실감하는 소비자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일부에서는 디플레이션을 우려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물가가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업들이 주장하는 내수 부진과 불황도 잘 들여다보면 과연 그러한가 싶다. 2분기에 이마트나 롯데마트가 부진한 실적을 냈지만 매출 자체는 전년 동기 대비 늘었다. 작년보다 많이 팔았지만 많이 벌지는 못한 셈이다. 쿠팡은 올해 거래 규모 10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쿠팡은 매년 매출액 기록을 경신하지만 적자 규모도 조 단위로 키웠다. 쿠팡 또한 많이 팔았지만 수익으로 연결하진 못한 것이다. 그래서 “내수 부진으로 힘들다”는 기업들의 주장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시장 규모는 커지고 있고 기업들의 매출 규모도 신장하고 있다. 내수가 부진한 게 아니라 경쟁자가 너무 많아졌다고 봐야 한다. 잦은 할인 행사에 ‘밑 빠진 독’인 배송 경쟁까지 이어가면서 손해를 보니 힘든 건 사실일 테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유통 기자로서도, 소비자의 한 사람으로서도 몹시 궁금하다. 어느 순간 무료배송이나 새벽배송 서비스가 대폭 축소된다면, 대규모 할인 행사도 뜸해진다면, 기업이 더 이상 제 살 깎아 먹기를 못 하게 된다면 소비자들은 어떤 타격을 받게 될까. 소비자 주권을 오래도록 가져가기 위해 어떤 전략을 마련해야 하는지 고민스럽다.

문수정 산업부 차장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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