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한인 노동자의 신앙공동체, 독립운동 베이스캠프가 되다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3부> 세계에 던진 메시지 (4) 하와이 독립운동 <상>

1903년 하와이에 정착한 한인 이민자들이 세운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116년 역사를 지닌 해외 최초의 한인교회다.

해외 한인 독립운동에서 미국 하와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이 하와이에서 충당되었고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이곳을 거쳐 갔다. 하와이는 중국 상하이와 더불어 해외 독립운동의 ‘베이스캠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03년 시작된 하와이 이민역사

19세기 후반 사탕수수 재배는 하와이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은 주로 중국과 일본 노동력에 의존했는데, 이들이 집단행동에 나서자 하와이사탕수수농장주협회는 구한말 조선의 노동자를 수입하기로 했다.

1903년 1월 13일 한인 최초로 102명의 이민단이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일본을 거쳐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민자들은 그해 11월 해외 최초의 한인교회인 한인선교회(Korea mission)를 세운다. 개성 남부교회 출신인 우병길과 인천 내리교회 출신인 안정수 등은 하와이 피어슨 감리사를 찾아가 호놀룰루 시내에 교회를 시작할 것을 부탁했고 2층 다락방을 빌려 첫 예배를 드린다. 이 교회가 현재 하와이 최대의 한인교회인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다.

하와이에서 한인 선교는 성공적이었다. 1907년 하와이에는 40여개 농장이 있었는데, 농장마다 교회나 전도소가 있었다. 단시일 내 교회가 한인 사회 속에 확산된 것은 이민자들의 고달픈 생활 속 신앙과 사귐의 공동체가 절실히 요청됐기 때문이다.

당시 전도에 열심이었던 한인교회의 분위기는 ‘감리교의 하와이 선교 저널’(1908년)에 나와 있다. “도박이나 주색 그리고 아편까지 피우던 사람들이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게 됐으며, 이제는 죄 가운데 헤매고 있는 이전의 동료들을 적극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데 앞장서 있다.”

1903~05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러 온 한인은 7395명이다. 당시 하와이 전체 감리교회의 주일 출석자는 백인 64명, 일본인 276명이었지만 한인은 605명으로 월등히 많았다. 하와이 감리교인의 64%가 한인일 정도로 신앙심이 남달랐다. 이들은 독립운동에도 정신적·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의준 하와이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목사는 “한인교회는 단순히 신앙공동체에 그치지 않고 한인들의 센터 역할을 했으며, 교육과 문화 활동의 중심이 됐다”고 소개했다. 이어 “하와이 한인 감리교회가 자연스럽게 한글을 가르치고 민족 정체성을 가르치는 공간이 되다 보니 해외 민족운동의 터전이 됐다”고 설명했다.

하와이 독립운동의 대부 이승만

이승만(1875~1965) 박사를 빼놓고는 하와이 지역교회와 독립운동을 설명할 수 없다. 이승만은 1899~1904년 한성감옥에 투옥됐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그가 저술한 ‘독립졍신’에서 나와 있듯 이승만은 기독교가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한국 민족을 정신적 도덕적으로 거듭 태어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종교라 믿고 있었다.

그는 하와이에 오기 전부터 한국에서 독립협회 활동으로 청년 개혁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개화기 미국 유학을 했던 한국 지식인이 모두 합쳐봐야 70명 미만이던 시절, 이승만은 1905~1910년 미국 최고 명문인 하버드대에서 석사학위를,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게다가 최초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위상이 남달랐다. 그는 귀국 후 1910~12년 서울 YMCA 총무로 재직했다.

이승만이 일제의 개신교 지도자 박해를 피해 하와이에 도착한 것은 13년 2월이다. 최고의 명성만큼 하와이에서 언론, 교육, 선교에 탁월한 성과를 내면서 한인 사회에서 주요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는 한국인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독립의욕을 고취할 영문 월간잡지인 ‘태평양 잡지’(The Korean Pacific Magazine)를 발행하고 ‘한인중앙학원’에서 한인 2세에게 영어와 성경, 우리말, 한국역사를 가르치면서 민족혼과 독립정신을 불어넣었다. 하와이 오아후섬의 펄 시티를 중심으로 교회 부흥운동을 벌여 세례를 받는 교포의 수가 대폭 늘었다.

당시 미국 감리교회 워드만 감독은 이런 보고를 했다. “리승만 박사는 지난 수년간 한인교회의 기둥이었습니다. 그의 봉사 없이 어떻게 우리가 성공적인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가 하와이에 길이길이 머물면서 일해 주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강력한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감리교의 하와이 선교 저널’ 중, 1913년)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안에 설치된 이승만 초대 대통령 동상. 이 교회는 이 전 대통령이 미국교회의 도움 없이 한인들을 모아 시작했다.

초창기 하와이 한인사회는 이승만의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실제로 1914년 푸우누이에 여학생을 위한 기숙사 대지를 매입하려고 할 때 한인들은 짧은 기간 4000달러를 모금해줬다. 당시 사탕수수 농장에서 10시간을 근무한 노동자의 월급이 18달러였음을 감안하면 거액이다. 이런 지도력을 갖추고 있다 보니 프라이 감리교 감독은 1915년 연회 보고서에서 이승만을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지칭했다.

하와이 이승만연구소 신현욱 소장은 “하나님께선 100년 전 기독교 신앙 위에 민족주의 사상으로 무장하고 국민교육과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했던 이승만이라는 준비된 종을 쓰셨다”면서 “한국이 기독교 국가로서 동양을 인도할 것을 확신했던 그가 훗날 건국 대통령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하와이=글·사진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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