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종순 (3) “종순이 노래 잘하네, 음악가가 되면 좋겠다”

머릿속에 목사 소명으로 가득한 내게 “웅변도 잘하니까 정치인 돼도 좋겠다” 길잡이 돼주신 은사들

박종순 목사(오른쪽)가 11살이던 1951년 고향 마을 화호리에서 어머니 최선옥 권사와 함께했다.

좋은 목사가 되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반복해서 듣다 보니 어느새 나의 꿈이 됐다. 장래희망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장점이었다. 푯대를 세웠으니 좌고우면할 이유가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 기도하게 됐다. “주님, 좋은 목사가 될 수 있게 해 주세요. 절 이끌어 주세요.”

교회와 학교는 놀이터였다. 산과 들에서 뛰어노는 것도 좋았지만 교회와 학교에서는 내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다. 사실 날 키운 요람이나 마찬가지였다.

화호초등학교에서 많은 스승을 만났다. 2학년 때 담임은 이영자 선생님이었다. 초등학교 선생님 중 유일하게 이름을 기억하는 은사이시다.

친구의 누나이기도 했고 장로님 딸이다 보니 공감대가 많았다. 내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걸 알았던 선생님은 늘 복음을 선포하셨다. 신앙적으로 이끌어 주신 것이다. 큰 사랑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도 감사한 분이었고 하나님이 내게 보내 주신 도움의 손길이었다.

4학년 때는 정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내게 글씨 쓰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종순아, 글씨를 바로 써야 한다. 괴발개발 써서는 큰일을 할 수 없다. 글을 바르게 써야 정직한 말을 할 수 있는 거란다. 건강한 말은 널 바른 어른이 되는 길로 이끌 것이다.”

따뜻한 조언이었다. 사실 누구도 내게 이런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아버지도 계시지 않았고 주변에 친척도 없었다. 인생의 길잡이를 만나는 게 쉽질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

선생님들의 사랑이 빈자리를 대신했다. 선생님들로부터 풍성한 사랑을 받았다. 모두 주님의 은혜다.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음악 담당이었다. 그분이 어느 날 포스터 한 장을 내밀며 전라북도 주최 노래경연대회에 나가라고 말씀하셨다. 얼떨결에 출전했다. 연습이라고는 교회에서 찬양을 부른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독창 부문에서 1등을 차지했다. 경쟁을 통해 뭔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던 기회였다.

그 뒤로 선생님은 날 음악실로 자주 부르셨다. 굶는 걸 아셨던 선생님은 자신의 도시락도 나눠주셨다. 짧은 식사시간이 끝나면 함께 노래를 불렀다. 시골 학교였지만 낡은 피아노가 있었다. 선생님은 연주하시고 난 노래를 불렀다.

이탈리아 나폴리의 민요인 산타루치아를 불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난다. “음악에 소질이 있구나. 종순이는 음악가가 되면 좋겠다.” 선생님의 조언에 잠시나마 성악가를 꿈꿨다. 그분은 내게 여러 직업의 세계를 보여줬다. “얘야, 넌 웅변을 잘하니까 정치인이 돼도 좋겠구나.” 가끔 생각한다. ‘그 선생님이 교회에 다니셨다면 내게 목사가 되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당시 내 머릿속엔 목사라는 꿈이 가득했다. ‘역시 목사가 나의 소명이구나.’ 물론 말을 잘하는 것과 설교를 잘하는 건 큰 차이가 있다. 설교는 신앙적 삶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내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으셨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 바람이 서원기도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목회자의 길이 주님이 내게 준 소명이라고 확신했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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