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종순 (5) 까까머리 고등학생에게 “교회 개척해 볼래?”

알고 지내던 목사님 제안으로 방학동안 여름성경학교 열어… 훗날 그 기도처가 교회 돼 감격

박종순 목사가 첫 목회를 경험했던 전북 완주군 율소리의 기도처는 훗날 봉동율소교회가 됐다. 사진은 봉동율소교회 종탑과 예배당 모습.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꿈까지 꿀 정도였다. 가난은 소년의 열망까지 뺏지 못했다. 늘 기도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는 기도가 간절하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주님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좋은 선생님들을 통해 날 중학교로 이끌어 주셨다. 언제나 좋은 곳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때도, 지금도 그렇다.

은혜 가운데 시작한 중학교 생활은 감사와 기쁨이 가득했다. 마음도, 몸도, 신앙도 성숙했다. 날이 갈수록 목회자가 되겠다는 희망이 또렷해졌다.

중학교 3학년이 됐다.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해야 했다.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졌는지 어머니가 고등학교 이야기를 먼저 꺼내셨다. 말도 못 하고 눈치만 보던 내겐 천군만마나 마찬가지였다.

“어머니, 저 전주로 유학 가고 싶어요. 영생고등학교에 가고 싶습니다.” 좀 더 넓은 곳에서 살고 싶었다. 어차피 대학도 서울로 가야 하니까 미리 경험하자는 노림수도 있었다. 중학교 입학을 위해 너무 마음을 졸여서였을까. 고등학교 진학은 순조로웠다.

전주에서의 유학 생활은 유익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실했다. 뭘 하든 열심히 했다. 삶의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좋은 목사가 되자는 것이었다. 흔들리지 않았던 목표가 일상을 이끌었다. 신앙이 깊어졌던 시간이었다. 영생고에 신앙 좋은 학생이 있다는 소문이 났다.

평소 알고 지내던 한 목사님이 까까머리 고등학생에게 흥미로운 제안을 하셨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있던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종순아, 너 교회 개척해 볼래?” 뜬금없었다. “전 못합니다. 어린 데다 신학을 한 것도 아니고….” 목사님은 완고하셨다. “너보고 목사 노릇하라는 게 아니다. 방학 동안 시골에 가서 동네 아이들과 잘 놀라는 말이다. 전주에서 신앙 생활하며 배운 것도 가르쳐 주고 좋잖니.”

‘또래들과 여름성경학교 하라고?’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어차피 화호리에 가도 특별히 할 일은 없었다. 목사님께는 해보겠다고 말씀드렸다. 방학이 시작되기까지 찬양 연습도 하면서 즐거운 상상에 빠졌다. ‘어떤 아이들을 만나게 될까.’

방학식이 끝나고 바로 짐을 싸 전북 완주 봉동읍 율소리를 찾았다.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작은 기도처가 있었다.

교인들은 많지 않았다. 주민들은 낯선 외지인을 내치지 않고 품어 주셨다. 마을의 한 부잣집에서는 마당을 내주고 천막까지 마련해 줬다.

그해 여름, 나와 율소리의 까까머리들은 기도처와 천막, 산과 들을 뛰며 즐겁게 지냈다. 기도하고 찬양하다 축구와 배구도 했다. 물고기 잡는다고 온 냇가를 뛰어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전주에서 갈고 닦은 찬양을 전수했다. 이웃 마을에서도 율소리를 찾았다. 어느새 100여명이 모였다.

훗날 율소리의 기도처는 봉동율소교회가 됐다. 고등학교 시절 찾았던 기도처가 교회가 됐다는 사실은 언제 생각해도 감격스럽다. 교회가 반석 위에 서는 데 작은 기여를 한 것 같아서다.

얼떨결에 경험한 서툰 목회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목사가 된 뒤 눈물 날 정도로 힘겨웠던 순간에 율소리를 떠올렸다. 교인들과 즐겁게 사역하기 위해 노력했다. 주님의 종이 늘 비단길만 걸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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