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종순 (6) 갓 스무 살에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다

‘교회개척을 한 소년’이라는 소문에… 한 목사님, 교회 맡아 달라 요청

박종순 목사가 다녔던 전주고등성경학교의 전경. 학교는 1961년 전주한일신학원이 된 뒤 4년제 대학인가를 받아 98년 한일장신대로 교명을 변경한다.

1940년생인 나는 현대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었다. 일제강점기 때 어린 시절을 보냈고 철이 들자 전쟁이 터졌다. 결핍이 일상이었고 살아남는 게 은혜였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니 감사할 것도 많았다. 주변의 모든 것을 두고 감사기도를 했다.

율소리에서 동네 아이들과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독특한 경험이었고 큰 은혜를 받은 시간이었다. 5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대학에 가지 않았다. 전주 시내에 있던 ‘전주 고등성경학교’에 먼저 진학했다. 이 학교는 훗날 한일장신대가 됐다. 성경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사모하던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니 꿀맛처럼 달았다.

그런데 지역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교회개척을 한 소년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율소리에서 보낸 여름방학을 두고 하는 뜬소문이었다.

소문은 무서웠다. 한 목사님이 날 찾아오셨다. “자네는 목회 경험도 있으니 완주에 있는 서두교회를 맡아주겠나.” 목회경험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찬양하며 여름방학을 보낸 게 전부였다. 그래도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힘이 닿는 데까지 교회를 돌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다리에 힘이 풀리고 비지땀이 쏟아졌다. 갓 스무 살이 된 청년이 돌보기엔 교회 규모가 너무 컸다. 교인이 300명이 넘었고 장로님도 3분이나 계셨다. 도망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퇴로가 없었다. 부딪혀 보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뭐라 설교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과연 설교를 했던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청년부원들과 시간이 날 때마다 배구를 했던 기억이 가장 생생하다. 성탄절을 앞두고 음악회를 준비했던 것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휘자가 없어 직접 선곡부터 지휘까지 맡았다.

나이는 어렸지만 그래도 교역자였다. 대접받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어리다고 무시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 장로님의 기도가 마음에 걸렸다. “주님, 이 시간 어린 종이 나와 말씀 전하니 능력 주옵소서.”

맞는 말이었는데도 기분이 나빴다. 시내에 나가 중절모와 검은색 뿔테 안경을 구했다. 어른들의 물건 뒤로 숨기로 작정했다. 그런다고 나이가 들어 보일 리는 없었다. 위장을 한 뒤 장로님께 면담을 요청했다. “장로님, 늘 사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많이 어리죠?” 장로님께서는 날 한참 쳐다보시더니 “알았어요”하고 일어나셨다.

주일이 됐고 그 장로님이 기도를 위해 단에 오르셨다. “주님, 사랑하는 젊은 종에게 능력과 권능을 부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어린이가 젊은이가 된 것이었다. 어리고 젊은 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이런 데 신경을 썼던 그때, 지금 생각해도 많이 어렸다.

나이와 관련해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총회장까지 마치고 200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나성영락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다. 61세 때였다. 설교에 앞서 그 교회 장로님이 대표기도를 하셨다. “이 시간 모국에서 노종을 보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니 노종이라니, 내가 그렇게 늙었다니’ 언짢았던 그 순간 서두교회 장로님 앞에서 투정하던 약관의 박종순이 떠올랐다.

“그래, 어린 종이 젊은 종을 지나 이제 노종이 됐구나. 나이 어리고 많은 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언제나 주님의 종으로 살고 있는데.”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