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한인 교회 앞장서 광복운동 후원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3부> 세계에 던진 메시지 (5) 하와이 독립운동 <하>

미국 호놀룰루 누우아누 스트리트에는 1907년 하와이 최초의 한인 통합 단체인 한인합성협회가 사용하던 회관건물이 그대로 있다(오른쪽 붉은색 상가).

하와이 독립운동의 두 축이 있다면 한인 단체와 교회다. 한인 단체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교회는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와 한인기독교회가 독립운동의 주축이 됐다.

대한인국민회의 전신은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다. 협회는 1907년 조국의 국권 광복 운동을 후원하며 동포들의 안녕과 교육사업을 증진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로, 하와이에 산재해 있던 24개 단체의 한인 대표 30여명이 힘을 모았다.

협회는 호놀룰루 릴리하가에 중앙회관을 설치하고 47개 지회를 설립했는데 회원만 1051명이었다. 협회는 1909년 미주 본토의 공립협회와 국민회를 탄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 총회라는 이름으로 계승된다. 미국 정부로부터 한인자치 기관으로 인정받아 경찰권을 행사하는 등 한인사회 보호와 항일운동을 병행했다. 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엔 국민의무금을 모집해 상해 임정에 송금하는 등 적잖은 공헌을 했다. 한인합성협회 회관 자리는 현재 호놀룰루 차이나타운 안에 있으며, 당시 건물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하와이 한인들을 대변하던 대한인국민회는 1915년 분열을 겪었다. 하와이의 양대 지도자인 이승만(1875~1965)과 박용만(1881~1928)이 한인여학원 설립 문제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1890년대 한국에서 개혁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감방동지로서 서로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분이 깊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두 사람은 독립운동의 관점부터 달랐다. 서울 상동교회 청년회에서 신앙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박용만은 무력을 통한 주권회복을 강조했다. 하와이 오하우섬에 캠프를 설치하고 한인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반면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일본과의 군사적 대결은 무고한 백성의 피만 흘릴 뿐 실질적 소득이 없을 것이라 주장했다. 인류 양심과 여론에 호소해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도록 외교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한인회 조직이 이승만 후원파와 박용만 후원파로 갈리게 됐고 교회까지 분열하게 된다.

이승만은 미국 감리교단 소속이었던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를 떠나 18년 30여명의 성도와 함께 한인기독교회를 세운다. 초대 목사로 민찬호(1878~1954)를 청빙했다. 그는 이승만과 같은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서울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05년 하와이에서 목사가 된다. 11년 미국 LA 남가주대학에서 신학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고 한인 목회자로 활동하다가 이승만의 요청으로 교회 담임목회자와 한인기독학원 학감을 맡았다.

그는 사회단체인 공진회를 조직하고 민족의 지도자가 될 인재 양성을 꾀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민찬호는 이승만과 깊은 친분을 맺었기 때문에 일제의 자료에는 ‘이승만의 복심’으로 나온다. 그의 무덤은 독립운동에 힘썼던 한인들이 다수 묻힌 오아후 공동묘지에 있다.

한인기독교회는 건물 모양만 봐도 쉽게 정체성을 읽을 수 있다. 성도들은 38년 4월 교회 정면을 광화문 누각 모형으로 만들어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삼았다. 성도들은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지했으며 예배당 안에 국어학반을 설치하고 한인 아동의 국어교육을 장려했다.

한인기독교회는 85년 이승만의 동상을 세웠으며, 최근 박물관도 만들었다. 동상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한평생을 오로지 한국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바치신 리승만 대통령을 기리는 조국 동포와 하와이 교포들은 정성을 모아 이 동상을 여기에 세운다.” 한인기독교회에서 동쪽으로 11㎞ 떨어진 곳에는 마우날라니 요양센터가 있는데, 이승만이 67년 7월 서거한 곳이다.

하와이에는 이승만이 주도했던 교육사업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이승만은 13년 한인기숙학교 학장에 취임해 교육사업에 종사했으며, 14년 여학생 기숙사를 설치하고 18년 현재의 알리이올라니 초등학교 자리에 한인기독학원을 세웠다. 이곳엔 한인기독학원이 1918~22년 운영됐다는 기념비가 설치돼 있다.

하와이에선 이승만 박용만 민찬호 외에 상동교회와 정동교회에서 목회하고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부장대리로 일했던 현순(1880~1968) 목사, 하와이의 부인회를 모아 독립운동가의 가족을 돌보는 데 앞장섰던 문또라(1877~1971) 전도사 등이 한인교회 공동체를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양효직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목사가 광화문 누각 형태의 교회 앞에서 독립운동에 앞장선 이민교회의 역할을 소개하는 모습.

한인기독교회 양효직 목사는 “하와이에서 한인들이 세운 교회는 독립운동을 위해 기도와 물질로 도운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니고 있어 이민교회의 모델이라 할 수 있다”면서 “안타깝게도 이민 3세로 넘어가면서 그 유산이 전수되지 않고 있다. 한인기독교회가 교회 내 이승만 박물관을 만든 것도 이런 이유”라고 설명했다.

양 목사는 “이승만이 기독교 지도자로서 교육과 선교에 집중했던 것은 미국에서 신앙의 축복이 무엇인지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라며 “신앙적 통찰력을 지녔던 건국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신앙적 평가를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와이=글·사진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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