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종순 (7) 장로회 신학대 진학… 가난했던 시절, 늘 기도했다

나이·수준 달랐던 동기들과 경쟁, 공부 어렵고 배고파도 늘 당당해… 식비 부족해 산책하며 묵상하기도

서울 광진구 장로회신학대학교 옛 본관 건물 모습. 박종순 목사는 이곳에서 목회자의 꿈을 키웠다.

전주 고등성경학교를 마치고 장로회신학대에 진학했다.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성경학교였다.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총회 신학교였던 장신대와 연결됐다. 선교사님들이 교수로 사역하는 학교였다. 세계의 신학을 접할 수 있는 학풍이 마음에 들었다.

1960년대 초, 장신대가 있던 서울 광진구 광장동은 민둥산이었다. 사방이 벌판이었다. 저 멀리 한강이 내려다보였다. 여름에 큰비가 내리면 어김없이 범람했다. 작은 동산에 학교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외딴 섬 같은 적막함이 있었다.

장신대에서 공부는 어려웠다. 동기들과 수준이 맞지 않았다. 당시에는 학생 구성이 다양했다. 나이도 천차만별이었다. 대학에 다니다 편입한 학생도 있고 아예 대학을 졸업한 형님들도 있었다.

많이 배운 이들과 경쟁하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시골에서 초보 목회를 경험하다 성경학교 다닌 게 전부인 나는 내세울 이력이 없었다. 함께 공부한 친구 중에는 훗날 월드비전 회장 박종삼 박사, 장신대 교수 이형기·박수암 박사, 예장통합 총회장 김순권 목사 등이 있었다.

수준과 나이에 차이가 났지만 우린 모두 친구였다. 가난하던 시절, 가난이 우릴 하나로 묶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대표였다. 스스로 ‘가난과 과대표’라 여겼을 정도였다. 하지만 비굴하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내지도 않았다. 늘 당당했다. 오랜 세월 따라다녔던 가난이 오히려 날 강하게 만들었다.

장학금 덕분에 휴학하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보요한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남장로교 총회가 주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기숙사 비용은 권세열 선교사가 홍제동에 연 야학에서 교사로 일하며 받은 돈으로 충당했다. 얼마 안 되는 돈이었지만 기숙사 비용을 낼 정도는 됐다.

문제는 식사였다. 식비가 늘 부족했다. 학교 식당에서 파는 식사가 13환이었다. 밥 한 그릇에 시래깃국이 전부였지만 이마저도 먹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밥을 못 먹은 날이면 조용히 학교 뒷산인 아차산으로 향했다. 산책하며 묵상했다. 나름대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산책 때문에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종종 사라지는 날 두고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63년 문을 연 워커힐호텔이 화근이었다. 한 친구가 날 따로 불렀다. “종순아, 너희 집이 아무리 부자라도 그렇지. 신학생이 매일 워커힐호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 되겠니.”

황당했지만 크게 웃고 말았다. 가난하다고 좌절하지 말자는 소신을 친구들이 알아준 것 같아 오히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가난했던 시절, 우린 늘 기도했다. 밤마다 기숙사 옥상에 올라가 가마니를 깔고 무릎을 꿇었다. 주변은 조용했다. 하늘의 별은 잡힐 듯 가까웠다. 들리는 건 옆에 있는 친구의 기도 소리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화호리 교회에서 어머니와 기도하던 때가 떠올랐다. 물려줄 유산이라고는 신앙밖에 없었던 어머니가 정말 좋은 걸 주셨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장학금을 준 선교사님이나 좋은 신학의 동지들, 언제나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았다. 돌아보면 후배들에게 받은 사랑을 나누기 위해 무던히 애썼던 삶이었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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