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종순 (9) 화사하고 밝게 웃는 모습… 첫눈에 반해 결혼

여러 젊은 여성 중 유독 눈에 띈 여인… 차 마시며 ‘목사 사모 적임자’로 확신

박종순 목사(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의 가족사진. 박 목사의 왼쪽이 최영자 사모다.

아내 최영자 사모를 만난 건 내가 스물여섯 살 때였다. 충신교회 교육전도사 시절이었다. 어느 주일, 교회학교 아이들과 함께 있는데 교회에 여러 명의 젊은 여성들이 들어왔다. 유독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아내가 될 사람이었다. 그날부터 교회에 오면 주위를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멀리 지나가는 것만 봐도 한 주가 즐거웠다. 오가다 인사한 게 전부였지만 내 마음은 커졌다.

우연히 미래의 아내와 차를 마실 기회가 생겼다. 어색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대화를 해보니 심성이 고왔다. 신앙은 청교도적이었다. ‘목사 사모로 적임자를 만났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속앓이가 시작됐다. 결혼할 운명이었는지 몇 차례 더 만날 기회가 생겼다. 아내도 내가 싫지 않은 눈치였다. 그 시절 용산구 갈월동에 ‘태양당’이라는 이름의 빵집이 있었다. 가난한 전도사가 데이트 비용이 있을 리 없었다. 아끼고 쪼개 모은 돈으로 빵 한 개와 우유 한잔을 시켰다. 이걸 둘이 나눠 먹는 게 데이트의 전부였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했다. 가정형편이며 장래희망, 신앙을 이야기했다.

만나면 좋았고 헤어지면 애틋했다. 내세울 것 없는 전도사가 선뜻 고백하는 게 쉽지 않았다. 기도했다. 의지할 데라고는 주님뿐이었다. 기도 끝에 용기를 냈다. 아내는 화사했다. 밝게 웃는 모습이 마음을 떨리게 했다.

“가난한 전도사입니다. 저를 만나면 고생할 겁니다. 어쩌면 자급자족하는 목회를 할지도 모릅니다. 손수레에 잡동사니를 싣고 팔러 다녀야 할지도 몰라요. 전 영자씨가 좋습니다. 선택은 영자씨가 해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수십 번 연습했던 말이었다. 눈앞이 멍해졌다. 인사를 한 뒤 돌아섰다. 하루가 1000년 같다는 성경 말씀이 실감 났다. 도무지 시간이 가질 않았다. 답은 없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드디어 연락이 왔다. 초조해졌다. 뭐라고 할까. 궁금했다. 장소는 태양당이었다.

입만 쳐다보는데 드디어 말문이 터졌다. “전도사님이 수레를 끌면 저는 뒤에서 밀게요.” 됐다. 감사했고 기뻤다. 그리고 미안했다. 고생할 게 뻔해서였다.

결혼식은 1966년 6월 6일 충신교회에서 했다. 정운상 목사님이 주례를 해 주셨다. 특별히 준비할 게 없었다. 가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흰색 한복에 베일만 썼다. 반지도 없었다. 나의 예복은 남대문에서 헌 양복을 팔던 최 집사님이 마련해 주셨다.

온양온천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기차에 앉으니 현실이 보였다. 무겁고 힘겨운 현실이었다. 그래도 나는 교역자 아닌가. 아내에게 신앙 안에서 희망을 심어주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신방은 내가 살던 갈월동 셋방이었다. 그러다 도원동으로 이사했다. 그 뒤로는 어디로 언제 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만큼 이사를 많이 다녔다. 아내는 든든한 조력자였다. 나는 늘 책을 샀다. 다행히 기독교문사를 운영하시던 고 한영재 장로님이 날 많이 도와주셨다. “박 전도사님, 필요한 책 있으면 가져가고 책값은 천천히 갚아요.” 형편에 맞지 않는 비싼 책을 싸들고 집에 올 때마다 아내 눈치를 봤다. 아내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고맙고 미안했다. 가난한 전도사의 아내는 그렇게 남편을 응원해줬다. 그 힘으로 나는 점점 목회자가 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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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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