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종순 (8) 우연한 두번의 만남이 이어준 충신교회

정운상 목사님과 찬양 인도 맡았던 인연으로 사역 약속… 다시 만나 사역 부탁에 두말없이 “네”

박종순 목사(오른쪽 첫번째)가 1960년 12월 25일 전북 서두교회 성탄절 예배에서 지휘를 하고 있다.

신학 수업을 마친 뒤 목사 고시를 보기 전 전도사로 사역해야 했다. 1964년, 나는 운명처럼 충신교회와 만났다. 당시 교회는 용산구 후암동에 있었다. 교회 근처에 병무청과 시장이 있었다. 작은 교회였다. 지금 충신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던 모습이었다.

정운상 목사님이 교회를 이끌고 있었다. 성결교 목사였지만 장로님들이 그분의 설교에 감동해 담임목사로 모신 것이었다. 내가 전도사로 가게 된 건 정 목사님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정 목사님은 부흥강사로 유명하셨다. 어느 날 목사님이 한 교회에 부흥회 강사로 오셨다. 그 교회 목사님이 내게 한 가지 부탁을 하셨다. “박 전도사가 찬양을 잘하니 이번 부흥회에 오셔서 찬양 인도를 해 주세요.” 거절할 수 없었다. 순종하며 부흥회 찬양 인도를 했다. 거기서 정 목사님을 만났다. 그때 목사님이 나를 유심히 보셨던 것 같다.

부흥회 마지막 날 목사님이 나를 불렀다. “박 전도사. 다음에 나랑 같이 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에 모시고 싶습니다.” “사역할 기회를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짧은 대화였다. 물론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일상적인 인사라고 여겼던 것 같다.

졸업을 앞둔 63년, 동기들 모두 임지를 두고 기도했다. 그때도 충신교회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가장 먼저 부르는 곳에서 사역하겠다고 기도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라는 찬양이 교회 선택의 유일한 조건이던 시절이었다.

그해 11월 학교에서 정 목사님을 우연히 만났다. “우리 교회로 오셔야죠.” 목사님은 그때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 “네. 가겠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기도한 것처럼 순종했다.

정 목사님은 내게 교회학교와 장년 교육을 맡기셨다. 하지만 막상 교회에 가보니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교회 예산으로는 내 사례비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 옛날 충신교회의 모습이 그랬다.

정 목사님은 교회 집사 3명에게 매달 1000원씩 부담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렇게 모아진 3000원이 내게 책정된 사례비였다. 그 돈으로는 쌀과 부식을 샀다. 여가활동 등을 할 형편은 안 됐다. 밥 먹으면 사역하는 게 일상이었다.

사택은 갈월동에 얻어 주셨다. 판자로 얼기설기 지은 허술한 집이었다. 방이 세 개였다. 처음에는 나 혼자 다 쓰는 줄 알고 잠시 기뻤다. 꿈이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문간방에는 알코올 중독자인 주인이 앉아 있었다. 끝 방에는 모자가 살았다. 나에게 배정된 방은 한 칸이었다.

천장은 쥐들의 놀이터였다. 비가 많이 내려 천장이 젖으면 쥐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런 방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환경이지만 그때는 그래도 감사하며 살았다.

사역은 쉽지 않았다. 외부 활동이 많으셨던 정 목사님을 대신해 모든 사역을 해야 했다. 새벽기도부터 심방, 교육부 행사 준비 등이 모두 내 책임이었다. 단독 목회를 경험한 셈이었다. 혹독한 훈련의 시간이었다. 그래도 고생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때 받았던 목회훈련이 내 생애를 지배했다. 그만큼 유익했던 시간이었다. 그런 면에서 늘 정 목사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 내게 기회를 주셨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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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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