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년 전 첫 호주 선교사로 온 데이비스, 도착 후 쓴 편지 본지 입수

“‘우리는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찬송이 저를 향해 격려하는 메시지로 들려오네요”

조지프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 국민일보DB

“금요일 아침이 돼서야 우리가 그토록 그리던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 태양은 밝게 빛났지만 공기는 차가웠습니다. 바다는 그야말로 평온했습니다.”

130년 전 내한한 호주 선교사 조지프 헨리 데이비스(1856~1890·한국명 덕배시)가 서울에 도착해 본국에 보낸 첫 편지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부산과 경남지역 선교를 담당했던 호주장로교 1호 선교사다. 그의 첫 편지는 일본 나가사키항을 떠난 이후 서울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 동료 선교사들의 환대, 선교에 대한 의지 등을 담았다. 편지는 1889년 10월 7일 월요일 작성했다. 국민일보는 7일 이상규 백석대 석좌교수로부터 편지를 입수했다.

조지프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해 작성한 첫 편지를 게재한 ‘데일리 텔레그램’ 기고 일부 모습. 이상규 교수 제공

이 교수는 “편지는 자신을 파송해 준 빅토리아주 청년연합회(YFU) 대표이자 투락교회 목사였던 이윙(JF Ewing)에게 보낸 것으로, 당시 호주에서 발간되던 ‘데일리 텔레그램’이라는 신문의 1889년 12월 11일 자에 게재됐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1987년 호주 멜버른의 시립도서관에서 이 편지를 발견해 사본을 간직해 왔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1889년 10월 2일 부산에 도착해 4일 제물포, 5일 서울에 도착해 언더우드 선교사와 지내면서 5개월간 한글을 배웠다. 90년 3월 14일 선교사가 없는 곳에서 일하겠다는 각오로 부산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도보여행과 음식 탓으로 건강을 잃었고 폐렴과 천연두에 걸려 부산 도착 다음 날인 4월 5일 사망한다. 34세의 나이였다.

편지에 따르면 데이비스 선교사는 10월 2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당시 그가 탔던 증기선엔 일군의 선교사들이 함께 있었다.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벙커 선교사가 미국에서 짧은 여행을 마치고 서울 임지로 돌아가고 있었고, 북중국에서 일하던 3명의 미국 선교사 역시 임지로 귀환 중이었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배에서 한국인 신사 한 명을 만나는데 재일본 한국영사관 서기였던 안경수였다. 데이비스는 “내가 그에게 우리가 서울에서 좋은 친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그는 즉시 영어(An Kiong Shiu)와 한자가 병기된 그의 명함을 주었다”고 적었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부산에서 제물포로 오면서 제주도의 풍경을 목격했다. 그는 편지에서 “남쪽 저 멀리 오클랜드산을 닮은 제주도(Guelport)를 보았는데, 벙커씨는 이 섬이야말로 때 묻지 않은 미개척 지역이라며 선교사들이 일할 수 있는 좋은 지역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 누구도 이 섬에 상륙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라고 기록했다.

제물포에서 서울 가는 길도 묘사했다. “대부분 산은 벌거숭이였고 벌목된 오래된 소나무 그루터기에서 자란 작은 소나무들로 덮여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무르익어가는 벼와 진녹색 채소밭은 풍성한 시골 풍경을 느끼게 했고 특별히 계곡을 따라 이어진 바다의 모습은 남부 이탈리아의 모습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서울에서 그를 환대한 것은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었다. 의료선교사 헤론이 말을 타고 영접을 나왔고 스크랜턴 부인이 따뜻하게 맞아줬다고 기록했다.

편지 끝에는 선교 의지를 다지는 내용이 담겼다. “‘우리는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하는 노래(찬송)가 들립니다. 저를 향한 뭔가 격려의 메시지로 들립니다. … 한국어 공부를 시작해야겠습니다. 우리를 위해 지속해서 기도해 주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입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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