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연예인이 등장할 때 함께 따라오는 자막이 있다. ‘아우라가 작렬한다, 형광등 100개가 온·오프 한다’ 등 유난히 반짝이는 외모를 가볍게 칭송할 때 쓰인다. 시대의 유행어가 돼버린 ‘아우라(aura)’는 곳곳에 있다. 아우라는 초록버스 뒷면 광고에 섬유 유연제로 포장되어 대도시를 향기롭게 누빈다. 송정역 앞 모텔 이름이기도 하고, 고가의 화장품이었다가, 웨딩홀, 술집, 클럽, 볼링장, 미용실, 포토 스튜디오로 여기저기에 편재한다. 대량 생산사회에서 소비주체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소비욕망을 부추기는 지점에 아우라는 무작위로 등장했다.

대체 아우라는 무엇인가. 자신의 저서 곳곳에 수수께끼처럼 아우라를 심어 놓은 벤야민은 아우라에 대한 정의를 변주하거나 유예하기 일쑤다. 그 의미가 명확히 잡히지 않지만 대략 정리하면, ‘오리지널이 가진 독특한 존재감으로 함부로 범접할 수 없기에 거리를 두게 하는’ 것이 그가 언급한 아우라의 한 축이다. 아우라가 성립되려면 손으로 만져지는 구체적인 물질성이 있어야 하고,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지금 여기 이곳에만 존재해야 한다. 일회성과 유일성, 현존성 모두 아우라의 성립 요건이다. 세상에 단 하나인 모나리자와 밀로의 비너스를 보기 위해 루브르에 가는 이유이다. 지금 여기 내 눈 앞에 있는 오리지널 작품을 확인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 단 하나이고, 지금, 여기에서 생생하게 살아 유일한 입김과 감촉과 목소리와 눈빛을 자아내는, 그야말로 아우라로 작렬하는 것이 있다. ‘나’ 이고 ‘너’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내 몸이고 너의 몸이다. 원래 아우라의 뜻에 ‘입김’이 있다. 입김은 보이지 않고 붙잡을 수 없는 형태로 살아 있음을 증거한다. 즉 숨 쉬는 모든 생명은 입김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요컨대 모든 생명은 ‘아우라’인 것. 아우라의 한 현상으로 막스 베버의 ‘카리스마(권위)’를 연결지을 수 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뜻하는 그리스어 카리스마(karisma)에서 유래한 말이다. 베버는 사회를 지배하는 형태의 하나로 권위(카리스마)를 내세운다. 주인의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는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임과 권위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권위가 없는 책임이란 있을 수 없고 책임이 따르지 않는 권위도 있을 수 없다”는 베버의 말은 진정한 카리스마를 호출할 때마다 등장하는 명언이다. 베버의 말을 경유해 ‘자존감’을 정의하면, 자존감은 몸의 주인인 주체가 자기 몸을 아끼고 보살필 때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다. 이 몸은 존재의 시공이자 토대이기에 내 몸을 돌보는 것은 몸의 주인인 주체가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인 것이다. 그때 우리 몸은 아우라로 빛난다.

그러나 현대인의 몸은 다른 몸들과 경쟁하느라 몸살 났다. 그 어느 때보다 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특히 여성의 몸은 과도하게 대상화되고 몸을 가꾸는 일이 하나의 미덕이자 경제적 가치가 되면서 ‘몸산업’들이 흥행가도를 달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신화되고 있는 몸의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몸이 대상화 될수록 한편에는 몸을 주체적으로 온전히 인식하기 위한 수행자들도 눈에 띈다. 몸과 마음, 즉 생리와 심리가 통합된 조화로운 심신(心身)을 가진 사람은 차원 높은 삶을 형성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지각의 매체로서 몸의 중요함을 알기에 삶의 기술을 회복하는 역동적인 몸을 구상한다. 몸을 떠나서는 살 수 없고 자기 몸을 이해해야 존재의 변환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 몸은 가을로 물씬하다. 봄여름을 지나 가을에 이르면, 마흔에 나를 낳은 엄마의 몸이 뚜렷해진다. 엄마가 나를 낳은 나이보다 내 나이가 많아질수록 가을은 유독 깊고 어둡고 빠르게 왔다. 특히 부모님이 모두 떠나신 후에는 해질녘이 아프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기운을 주자. 따뜻한 물로 향기로운 비누로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작품인 나(너)를 되도록 많이 만져주자. 어느새 새겨진 나이테가 선명히 드러나 주인을 반겨줄 터이니.

최연하 사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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