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공의를 펼치려 했던 시인의 푸른 꿈은 기도로 남아

‘파초’의 김동명과 고향 강릉

강원도 강릉 사천면 김동명문학관 복원 생가(오른쪽)와 전시실. 마당의 푸른 잎은 관엽식물 ‘파초’로 김동명 시인의 대표 작품명이다. 김동명은 일본 청산학원대학 신학부를 나와 캐나다장로회 선교지역인 함경도 함흥·원산을 중심으로 기독교교육에 힘썼다.

서울 봉원동 금화터널은 1979년 완공됐다. 이전까지 봉원동은 도심 속 산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화여대와 연세대 학생 및 교직원이 많이 살아 학사촌이나 다름없었다. 지난 주말 그 마을 봉원사길은 봉원사 사찰을 품은 안산을 오르려는 등반객들로 활기찼다. 1950년대 이 일대는 신촌동으로 불렸다.

김동명 시인 (1900~1968)

6·25전쟁의 참화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시인 김동명(1900~1968·전 이화여대 교수) 일가는 54년이 돼서야 다시 이곳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부산 초량에서 구제품을 얻어 헤지도록 입은 지 몇 해가 흘러서였다. 시인은 이때의 아픔을 ‘부산 추억’을 통해 이렇게 그려냈다.

‘허리통이/ 유난히 길어// 늬는 본시/ 파충류의 후예// 살이/ 생선처럼 싸늘한// 네 품에/ 세 해// 즐거운 기억이라곤/ 하나 없는// 서글픈 추억만이 반짝/ 등대처럼 켜진다’

시인의 청춘은 즐거운 기억이 없었다. 망국 직전의 백성으로 태어나 식민지 학생이 됐고 창씨개명을 피하고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비유와 은유의 언어를 써야 했다. 해방의 기쁨은 잠깐. 전쟁이 민족을 덮쳤다.

전도부인을 꿈꿨던 어머니

꽃 가꾸기를 잘해 ‘꽃집’으로 불렸던 신촌동 집으로 돌아온 시인은 어린 딸 손을 잡고 봉원사길을 걷곤 했다. 젊은 김형석(99·연세대) 교수가 흙을 이겨 흙마루를 짓고 글을 쓰고 있었다. 유동식 김동길 연세대 교수, 김활란 김옥길 김정옥 김자경 이화여대 교수 사택이 이웃이었다. 학자의 집이라고 해서 동네 사람 집과 별다를 데 없는 시대였다. 신앙공동체적 삶이었다.

월남 후 두 딸과 함께 찍은 사진.

시인의 딸 월정(시인)은 아버지와의 산책에 신났던지 ‘대니 보이’ ‘그네’ ‘옛날의 금잔디’ 등을 불렀다. 평화로웠다. 그가 꿈꾸던 세상이었다.

지난달 27일 강원도 강릉 사천면 ‘김동명문학관’에서는 검정고무신에 시화를 그리는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문학관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이 지도 교사의 능숙한 손끝을 주목했다. 문학관은 생가와 전시관, 기념조형물 등으로 이뤄진 공원이었다.

김동명문학관 시인의 원 저서 모음.

김동명의 대표 시 ‘파초’는 지금도 수능 문제로 출제되곤 한다. 38년 시인이 함경도 함흥에서 ‘원산지 남국을 떠나 먼 나라 땅에 심어진 관엽식물 파초’를 시상 삼아 식민지가 된 조국의 현실을 시로 쓴 작품이다.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네의 그 드리운 치마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강릉 복원 생가 방 안의 벽난로 코쿨.

김동명은 시인 국회의원(참의원) 정치평론가 교사 교수 교육가 등 크리스천 지도자로 사는 삶을 살았다. 조병옥 김도연 김산 전진한 김상돈 민관식 등 당대의 인물들과 교유하며 공의의 세상을 꿈꿨다. 목사의 꿈을 접었으나 진리와 정의를 사랑하고 부정과 불의를 참지 못하는 시인이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한 자유인이었다. 일본 청산학원대학 신학부를 졸업했으나 목회보다는 문학을 택했다. 아마도 3대 신앙으로 이어진 어머니 신석우가 아니었다면 그는 통음과 편린으로 침잠해 갔을 것이다.

김동명은 잡지 ‘개벽’에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주시면’ ‘애달픈 기억’ 등으로 등단했다. “너는 인젠 편지는 제법이도라. 말이 좀 까닭스러워 흠이지만. 그러나 아직도 병두(김동명의 연배 조카)마는 못해”하고 비평하던 무학의 어머니. 맹모삼천을 마다하지 않던 어머니는 “석 달(공부)이면 전도부인이 될 수 있다”며 아쉬워하곤 했다.

함흥 기독학교 동광학원. 설립에 참여했다.

그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개화도시 함흥 서호진으로 이사했고 캐나다장로회가 설립한 영생학교에 아들을 입학시켰다. 청산학원대학과 일본대학에서 공부한 그는 함흥으로 돌아와 미션스쿨 동광학원 등을 설립해 예수를 전했다. 청산학원대학 후배인 시인 백석과 영생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대학 동창인 김재준 송창근(훗날 목사·신학자) 등과 교유하며 기독교교육에 힘썼다.

영생학교 동료 교사 백석 시인(왼쪽)과 함께.

20년대. 그는 함흥 중하리교회 예배당에서 ‘여자해방의 인도적 의의’, 안주기독청년회에서는 ‘신시대의 주인’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했다. ‘함흥금주회대강연’을 통해서는 ‘공존공영의 세계적 정신하에 입하야’라는 주제로 역설했다. 당연히 기독교 가치관을 반영했다.

하지만 그는 식민지 지식인으로 한계에 부딪히며 구원과 절망을 동시에 겪었다. 시로 영성을 얻고자 했으나 민족 언어를 쓸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 낙담해 폭음하기도 했다. 42년 시 ‘술 노래’ ‘광인’을 끝으로 절필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해방 후 그는 조만식(기독교 독립운동가) 선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 흥남시당위원장을 맡아 기독교 사상에 바탕을 둔 공의를 선포했다. 그의 연설에 민주당원이 3~4개월 사이 10만명으로 급증하자 최용건(6·25전쟁 당시 인민군 총사령관)이 직접 함경도를 방문해 “반동 괴수 김동명”이라고 지목했다. 김동명은 46년 3월 함흥학생의거 때 구속되고 말았다.

북한에서 엑소더스한 그는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으며 ‘하나님 정의는 곧 평화다’는 논조의 정치칼럼을 지속해서 썼다. 사람들은 시인 김동명과 동명이인인 줄 알았다. 그리고 4·19 직후 6년 임기의 초대 참의원에 당선됐으나 5·16 군사쿠데타로 공의 정치를 펼쳐보지도 못한 채 재야인사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정의는 평화다”라 외쳐

현 시인의 복원 생가엔 등잔불 코쿨이 당시 모습대로 있다. 어머니는 코쿨 앞에서 소나무 옹이(광솔)를 넣으며 하나님 말씀과 ‘타방녀’ 등 옛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리고 양양서 원산을 잇는 기차에 태워 외동아들을 기독교 학교가 있는 함흥 대처로 먼저 보냈다.

김동명은 말년 천주교 개종 세례를 받았다. 당시 자기 아들이 천주교 신앙에 어찌나 열심이든지 그 간절한 소망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러나 ‘심각한 예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파와 당 짓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했기 때문에 의미 없이 받아들였다. 월정씨는 “오빠의 간절한 호소를 효심 어린 선물 정도로 생각하고 들어 주셨다”고 했다.

막힌 함흥 길. DMZ의 평화음악회 모습.

사실 김동명을 제대로 알려면 DMZ 너머 함흥 원산 흥남에 가야 한다. 캐나다장로회 선교부 주력 지역이었고 원산대부흥운동의 땅이어서다. 강릉에서 국도를 따라 북상하자 DMZ가 가로막았다. 민간출입 허용지역에서는 ‘하나를위한음악재단’의 평화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들은 “기도로 준비한 음악회”라고 말했다.

·1920년 함흥 영생학교 졸업
·1923년 '개벽' 통해 시인 등단
·1925~28년 일본 청산학원대학 신학부 수학
·1929~35년 교사 및 동광학원 원장
·1947년 민주당 함남도당 위원장 및 구금
·1948년 이화여대 교수
·1960년 초대 참의원 당선

강릉·DMZ=글·사진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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