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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박종순 (12) “이토록 행복하게 목회하는 내게 왜 이러시나”

목포 양동제일교회에서 사역중 충신교회 어려움 하소연에 고민… 아내의 지지 얻어 다시 고생길로

목포 양동제일교회 교인들이 1962년 5월 10일 교회 창립 65주년 예배를 드린 뒤 단체촬영을 했다.

남현교회가 안정기에 접어 들자 목포 양동제일교회에서 담임목사 청빙을 받았다. 서른세 살 때였다.

양동제일교회는 미국 남장로교 파송을 받아 사역하던 유진 벨 선교사가 1897년 세운 교회였다. 장년만 500명이 넘게 출석하고 있었다. 지방교회 중에서는 손에 꼽힐 정도로 큰 규모였다.

교인 대부분은 미션스쿨인 정명학교 교직원과 그 가족들이었다. 이분들이 교회에서 많은 봉사를 하셨다. 워낙 오래된 교회다 보니 유지들도 다수 출석했다. 든든한 교회였다. 목포의 첫인상은 거칠다는 것이었다. 선입견이었다. 교인들은 가슴이 따뜻했고 정이 많았다.

병원장이시던 한 장로님 기억이 난다. 깐깐한 성격의 장로님은 말씀이 없으셨다. 매년 초가을이면 일꾼과 함께 내가 살던 사택에 오셨다. 오래된 한옥이었다. 부임하자마자 겨울 추위가 걱정됐을 정도였다. 장로님도 추위 때문에 오신 것이었다. “목사님 사택이니 잘 봐주세요. 모든 창문을 비닐로 잘 막아주세요.” 일꾼에게 이렇게 부탁하셨다. 이후로 매년 가을 초입이면 장로님이 사택에 오셨다.

부목사를 하다 바로 큰 교회에 부임해 걱정이 컸다. 하지만 남현교회에서 어려움을 겪은 게 도움이 됐다. 물론 교인들이 교회를 너무 사랑해 생긴 일이었다. 나는 그 덕에 목회 실습을 톡톡히 했다. 양동교회도 훌륭한 목회 학교였다. 나를 목사로서 한 단계 성장시켜 준 교회였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1976년이 시작됐다. 어느 날 충신교회 장로님들이 목포에 오셨다. 긴 하소연을 하시는 게 아닌가. “이촌동으로 이전한 뒤 교회 건축을 시작했는데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담임목사님도 안 계십니다. 교회는 겨우 1층만 지었어요.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충신교회 교인들을 돌봐 주세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목포에서 이토록 행복하게 목회하는 내게 왜 이러시나.’ 양동제일교회는 지역사회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충신교회가 이전한 이촌동은 당시 벌판이었다. 모래사장과 미군 부대가 전부였다. 71년 세워진 한강맨션이 교회 근처 유일무이한 주택가였다.

게다가 내가 충신교회 사정을 너무 잘 알지 않은가. 교육전도사 월급도 주지 못해 집사 세명에게 내 사례비를 부탁했던 교회였다. 어느 정도 재정이 있어야 전도와 봉사, 선교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건축 중이라니, 그 자리에서는 답을 할 수 없었다.

“장로님들, 지금은 답을 못 드리겠습니다. 제가 홍콩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해야 합니다. 다녀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로님들도 물러서지 않으셨다. “목사님, 언제 귀국하시나요. 공항으로 나가겠습니다.”

진짜 고민은 따로 있었다. 충신교회 장로님들을 만난 순간 목사의 도리에 대해 생각했다. “목사를 원하는 교회로 가야지. 그게 목사지. 멋진 교회만 찾아다니려는 마음이 드는 순간, 그 순간을 경계해야지.”

아내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지지가 필요했다. 다시 고생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별다른 말이 없었다. 내게 힘을 실어준 것이었다. 충신교회에 가겠다고 답을 드렸다. 교회는 기뻐했고 내 마음은 무거웠다.

76년 5월 목포를 떠났다. 목포역에는 대충 봐도 600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날 환송하기 위해 모인 교인과 목포 각계 인사들이었다. 시장과 목포시 공무원들도 왔었다.

나는 어머니와 아내, 아이들 셋과 기차에 올랐다. 내 마음 알 리 없는 호남선 특급열차 ‘풍년호’는 용산역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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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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