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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소리]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 조커에 대한 연민


전설적인 록밴드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의 ‘악마에 대한 연민’(Sympathy for the Devil)이란 곡이 있다. 마치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처럼 악마의 입장에서 독백하며 당대의 시대상을 풍자한 곡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악마에게 일말의 연민을 갖거나 공감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악마 역시 처음엔 신의 피조물이었을 테니 어쩌다 그 지경이 됐는지 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악에 대한 사유는 역사적으로 늘 많은 의문과 논쟁의 중심이었다.

지난주 개봉한 화제의 영화 ‘조커’를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배우 호아킨 피닉스가 온몸으로 연기한 조커는 관객의 오감을 사로잡아 불편하지만, 시종일관 그에게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다. 배트맨 시리즈에 등장하는 악당 조커는 다수의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재해석돼왔다. 지금껏 가장 돋보이는 사례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에서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일 것이다.

어릴 때 지독한 학대를 당한 히스 레저의 조커는 자신을 실패자와 악마로 낙인찍어버린 사회에 대한 분노로 가득하다. 단순히 자기 이익을 좇아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다. 자신 같은 사람을 배제한 사회 정의를 공격하고 그 모순을 드러내는 일에 쾌감을 얻는다. 그래서 극 중 정의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배트맨과 하비 검사에게 분노한다. 복잡한 상황을 만들고 이들에게 도덕적 딜레마를 던지며 분노와 증오의 이유를 만들어 준다. 조커는 관객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내가 믿는 것은 시련이 너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는 거야.” 영화에서 그의 계획은 성공했다. 정의로웠던 하비 검사는 타락해 ‘투 페이스’라는 악당으로 변신하게 된다.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이보다 훨씬 더 연약하며 인간적이다. 영화는 조커가 악당이 되기 전 겪어야만 했던 고달픈 현실과 수모에 집중한다. 심지어 그가 우발적으로 범한 살인에 심리적으로 동조하며 일말의 통쾌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는 분명 처음부터 악인은 아니었다. 그는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코미디언을 꿈꿨다. 현실의 고통과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웃음으로 계속 억누른다. 하지만 그런 그를 받아줄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침내 악당으로 거듭난 그는 웃지 않는다. 광기의 해방감을 맛본 그가 이제는 웃을 필요가 없어진 까닭이다.

미국 기독교 윤리학자 라인홀트 니부어는 그의 명저 ‘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사회’에서 개인의 도덕적 가능성은 비도덕적 사회 구조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개인적 이기심은 사회 안에서 연합돼 공동의 충동으로 나타날 때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고 경고한다. 영화에서도 조커의 광기는 곧 집단화되며 악의 현실성과 사회성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정도와 상황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도 수많은 조커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그 대상을 악마화하고 비난하지만 여러 고된 상황에서 시나브로 악해져 가는 자신에게서 조커처럼 돼가는 것을 느끼곤 한다. 오늘도 거리에는 힘겹게 삶을 견디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의 언행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 서로를 악마화하며 대립하는 모습에서 영화 속 집단화되는 악의 광기가 떠오른다.

도덕적이며 선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도 내면의 분노와 관계적 폭력에 무너져가는 사람들이 안쓰럽다. 바울이 왜 그토록 처절하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절규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언 4:23)는 성경 말씀이 나를 지키는 절실한 기도와 경건의 목표가 돼야 할 것 같다.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의 도는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선한 내면을 지키는 힘겨운 싸움이니까.

윤영훈 (성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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